한상덕의 농담(農談)<12>

▲ 우리 밭에 열린 올해 첫 호박.

최근 도시민들의 귀농귀촌이 활발하다. 이들 중에는 성공적인 농촌정착으로 제2의 인생을 사는 이도 있고, 낯선 환경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도 있다. 본지는 재밌는 한상덕 씨의 생생한 귀촌일기 연재를 통해 후배 귀농귀촌인들의 시행착오를 덜어줄 지름길을 알려주고자 한다.

6월 녹음은 종갓집 맏며느리처럼 넉넉하지만 장마철엔 성가시기만 하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게 농사의 미덕(?)인데 돌아서면 휙 커버리는 야생초 덕분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고 외치는 술래 몰래 야금야금 다가가는 참가자 같은 야생초다.
지난해 호박농사는 망친 것도 아니고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분명 조선호박에서 나온 씨를 심었는데 호박잎을 먹을 수도 없었고 애호박도 열리지 않았다. 줄무늬호박, 조롱박처럼 생긴 호박, 똬리를 닮은 호박...  단호박도 아닌 것이 조선호박도 아닌 것이 호박사(史) 속에 나오는 모든 호박들의 전시장이었다.

알고 보니 모종 대신에 씨를 심은 게 화근이었다. 한쪽 유전자만 남겨놓은 모종이 아니라 온갖 유전자들이 다 모인 씨를 심은 게 문제였다. 모종을 사서 심으라는 할매 친구들의 훈수를 가벼이 여긴 결과였다.
그러고 보니 호박이랑 토끼는 닮아도 너무 닮았다. 분명 흰 토끼 암수 두 마리가 낳았는데 잿빛, 갈색, 노랑... 400~500백 년 전 지중해 연안에서 굴토끼를 잡아다 길들이던 그때의 토끼까지 다 태어날 기세다.

호박이든 토끼든 강제하면 모르겠지만 그대로 놔두면 제각각이다. 태초의 조상을 닮을 수도 있고 가까이 있는 형제자매를 닮을 수도 있다. 아니면 오늘 이 시점에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태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식물이든 동물이든 쉽게 바뀌는 존재가 아니다. 생존해온 길이만큼 끄는 힘이 있었기에 멀리 있는 짝을 유혹해 종을 번식할 수 있었을 게다. 나만의 뭔가가 있어 짝짓기를 하고 생존이라는 절체절명의 의무를 다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호박꽃 전부가 호박이 되지 않듯 번식률이 높다고 해서 모든 토끼가 살아남는 게 아니듯 여태껏 살아남았으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 정신은 사생활에 관심이 있고 개성을 중시한다. 귀촌생활이 꼭 그렇다. 나 아니면 누구도 내가 할일을 대신해주지 않는다. 대신에 ‘바쁘다’를 입에 달고 사는 허세에서 벗어나 스스로 고요를 만들고 그 속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며 즐길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귀촌과 SNS. 닮아도 너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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