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회 농촌 스토리 공모 당선작 - 안봉희 씨의 그 시골의 할머니들

▲ 농업과 자연은 그 어떤 성공이나 학력보다도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라며 안씨는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현재의 농촌 생활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힘든 일이 있으면 친정엄마보다
그 곳의 할머니를 떠올리곤 해요"

본지가 창간 10주년을 맞아 실시했던 ‘제1회 농촌 스토리 공모’ 당선작 중 이번 호에는 안봉희 씨의 ‘그 시골의 할머니들’을 싣고자 한다.
또한 현장 심층취재를 통해 미처 글로 표현하지 못한 숨은 뒷얘기와 감동을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시골에 산지 어느덧 7년째가 되어간다. 지금은 옥천에 집을 지어 나와 남편과 아이 세 식구가 살고 있지만 처음 우리가 귀농한 곳은 충북 괴산이었다. 그리고 지금 7살인 딸은 그때 뱃속에 있었다. 결혼 전 나는 전국귀농운동본부라는 단체에서 일하며 여러 귀농지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는데, 귀농지를 결정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었다.

처음 시골에 살려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해야 할텐데, 시골일수록 사람 사이의 관계가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진 것이 많지 않은 젊은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일할 당시 이사님 중 한 분을 무척 존경했는데, 염색하지 않은 하얀 머리에 전체적인 기운이 담담하고 지혜롭고 따뜻했다. 그분이 귀농하여 사시는 곳이라면 믿을만하다고 생각했고 그곳이 바로 충북 괴산이었다.

2010년 6월 뱃속 아이와 남편과 함께 친구의 트럭에 간소한 짐들을 싣고 와서 괴산 칠성면 월셋집에 부렸다. 집은 마을 한가운데에 있었다. 할머니가 혼자 사시다가 청주 손주네로 살러 가면서 비워뒀던 것으로, 옛 흙집을 세월에 따라 조금씩 개량한 전형적인 시골집이었다. 낮은 슬레이트 지붕은 약간 기울어 있었고, 화장실은 바깥에 있었지만 마당에는 질경이가 유난히 많았고, 드문드문 풀꽃들이 피어 있었으며 텃밭은 채소를 길러먹기에 충분했다. 볕이 좋았고 멀리 큰 산이 시원하게 자리해 일상적으로 마음을 울렸다.  

이사 와서 처음 일주일은 임신한 나와 남편이 직접 도배를 했다. 솜씨 없는 풋내기들이 하다보니 쪼매난 집을 하는데도 일주일이 걸렸다. 방 하나는 초배지로만 하고 아이 방과 부엌에는 개중에 가장 싼 도배지를 발랐다. 그때 우리 통장에는 200만 원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처음 일주일동안 동네 분들이 한번도 집엘 오시지 않았다. 도시에서 살다왔으니 ‘원래 이런 건가 보다’ 하고 처음에는 생각했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낯선 데서 우리대로 적응할 시간을 갖고 편히 짐정리하게 배려해 주신 거였다. 도배를 마치고 이사 떡을 돌리며 마을 분들께 인사를 드렸고, 젊은 사람들이 왔다며 안쓰러움과 의아함과 반가움으로 맞아주셨다.

그 마을은 친환경 잡곡을 주로 농사짓는 곳이어서, 남편은 그곳 영농조합의 간사로 일하고 나는 잡곡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렇게 시골에 첫 발을 들여놓은 때부터 마을 분들은 물론이고 일하며 만난 모든 분들께 참 많은 배려를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나중에 깨달았다. 그리고 뒤늦은 감사와 더불어 각별했던 할머니들에 얽힌 장면들은 지금까지도 무시로 떠오르곤 한다.
우리 옆집에는 체구가 작은 할머니 한분이 살고 계셨다. 부추는 어떻게 기르냐고 여쭤보면 이러저러하다고 자세히 알려주시고는 다음 날 호미로 부추뿌리를 한봉지 캐어다 안겨주신다. 어느 날은 갈무리한 들깨를 키질하려니 잘 되지가 않아 집으로 찾아가 여쭤봤다. 앞서가라며 따라 나오신다. 그리고 시범을 보이며 설명을 해주시고는 능숙한 솜씨로 어느새 직접 다 키질을 해주신다. 많이 물어보았고 늘 가르쳐주셨다. 우리는 이 할머니를 제일 좋아했는데, 할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꽂으면 다 먹게 되어 있어”
그 옆집은 마을 이장님 댁으로, 노할머니가 계셨는데 아주 정정하셨다. 때때로 조용히 마당을 둘러보고 가셨고, 우리 바로 뒷집에 외로이 혼자 사시는 아픈 할머니 댁에는 매일 꼭 찾아가시던 분이었다. 가을 무렵 마당에 호박과 가지를 말리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보시더니 볕 좋은 곳을 따라가며 말리라고 손수레를 내어주신다. 그리고 그 위에 얹어 쓰는 할머니의 넓은 판자도 손수 갖다 주신다. 또 할머니네 하우스 앞 빈터가 하루종일 볕이 좋으니 언제든지 쓰라고까지 일러 주신다. 옥수수를 많이 재배하던 곳이어서 옥수수도 곧잘 많은 양을 말리는데, 말린 옥수수알을 떼어낼 때는 고무코팅한 장갑을 끼고 짜듯이 비틀면 잘 털린다고 노하우를 전수해 주신다.

또 호박을 말릴 때는 씨가 잘리는 방향으로 썰어 말려야 씨앗 속까지 바짝 잘 마른다고, 늘 살피시며 작은 것 하나라도 도움을 주려 하셨다. 깻잎 김치 담그는 법을 여쭤보면 양념에 쓰라며 참깨를 또 한 봉지 가득 싸주신다. 할머니네 마실을 가면 빈손으로 가게 두질 않으셨다. 아이 과자 하나라도 꼭 챙겨주려고 하셨다.
이장님네 뒷집에는 50대의 아주머니 한 분이 홀로 중학생 아들을 키우며 살고 계셨다. 하루하루 농사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셨는데 주로 복숭아 과수원에 일을 다니셨고 6일을 일하면 하루는 꼭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아야 할 정도로 고되게 일하며 사셨다. 그런데도 수확철이 되면 복숭아를 챙겨 주시고 마을 잔치가 있으면 모르게 준비가 다 끝난 후에야 불러 밥을 먹이셨으며, 마을에서 나눌 선물이 있는데 우리가 모르고 있으면 직접 가져다 주시고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셨다.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길의 첫머리에는 여든에 가까우신 할머니와 선비 같으신 할아버지 두분이서 단출히 살고 계셨다. 할머니는 젊은 사람과도 진지하고 진솔하게 대화해 주시곤 했기 때문에 할머니와 이야기를 할 때면 마치 친구와 얘기한 듯 소통의 욕구가 해소될 정도였다. 그때 우리는 달걀을 먹는다고 닭 6마리를 구해 닭장에서 길렀는데 한 마리가 몹시 괴롭힘을 당해 밖에 풀어놓은 적이 있다. 일주일 정도를 그랬더니 이 닭이 마당을 벗어나 온 동네를 다니기 시작하는데...

어느 날 할머니께서 집에 오시더니 닭이 밭들을 헤집으니 본인이 잡아먹어도 되겠냐며 물으셨다. 마침 우리는 닭을 옭아오지도 못하던 차에 죄송하기도 하고 닭은 잡아 손질할 줄도 몰라서 얼른 그러시라고 죄송하다고 했다. 그런데 날이 어슬해질 무렵 할머니가 냄비에 그 닭을 잘 끓여서 반 너머 가져다 주시는 거였다. 우리는 정말이지 아이들처럼 맛있게 허겁지겁 먹었다.

우리가 작게 농사짓던 밭은 이웃마을에 있었다. 우리 밭 아래에 사시던 할머니는 말씀을 어찌나 조용하고 따뜻하게 하시는지 옆에 아무 말 없이 가만히만 있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분이셨다. 아이를 유모차에 놓고 밭에서 일하고 있으면 아이 모기 뜯긴다고 본인도 농사일에 바쁘실텐데도 아이를 할머니 집에 맡아주셨다. 고구마가 한창 무성히 자라고 있을 때였는데, 할머니께서 고구마 줄기를 좀 뜯어가도 되냐고 하시기에 얼마든지 그러시라고 했다. 다음날, 할머니는 우리 것도 같이 뜯어다 한 포대 가득 갖다 주셨다. 정말 많은 양이었다. 남편과 나는 그때 무척 놀랐다. 그런 행동은 언뜻 당연해보일 수 있지만 사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도시에서 살 때는 물론이거니와 시골에 사는 지금도 겪어 알기 때문이다. 그 마음씀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바르신 것을,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하며 살고 싶다는 것을 마음 깊이 되새겼다.

그 외에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고추장, 된장은 흔히 갖다 주셨고 상추, 파, 인삼, 올갱이국, 나물, 김장아찌, 옥수수, 서리태, 아이옷 등...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대한 기억들이 귀하게 떠오른다.
귀농하고 막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으니 남편과 나는 서로 힘이 들었던지 자주 다투곤 했는데, 추운 어느 겨울날 속은 상한데 어디 갈데가 없어서 경로당에 간 적이 있다. 할머니들 몇 분이 이불을 덮고 앉아 계셨고 따뜻한 데 몸 좀 녹이라며 이불을 여며주시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남편과 싸웠다 하니 손으로 다리야 등이야 쓸어주시며 젊은 사람이 시골에 와서 고생한다고, 우리도 젊을 때 많이 고생하고 살았지만 다 살게 되어 있다며 위로를 해주신다. 그리고 지난 이야기들을 도란도란 풀어놓으셨는데 그때의 할머니들 손길이 정말 잊혀지질 않는다. 당시 농사와 육아에 쩔쩔 매며 남편과 자주 다투었어도, 외롭거나 힘겨울 때 집을 나와 할머니들을 찾아가면 별다른 일이나 말 없이도 눈 녹듯이 마음이 풀어지곤 했다. 그 때문인지 어찌보면 힘들었을 시간을 전혀 다르게 돌아볼 수 있는 것 같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는 월세로 10만 원을 내며 살고 있었다. 귀농한 해 겨울에 아이를 집에서 낳았는데 돈이 너무 없어서 그런 줄 아시는 동네 할머니 몇 분이 모여 상의를 하셨던가 보다. 그리고는 우리 집주인 할머니께 연락을 취하셔서 집세를 받지 말라고 하셨던 것 같다. 집주인 할머니께서 우리에게 전화를 하셨고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그래도 또 그러기는 죄송하기도 하고, 하지만 살림살이가 변변치 못하던 터여서 그 후로는 5만 원을 내며 살았다. 추운데 아이를 낳고 보일러도 충분히 못 땔까봐 히터와 전기장판을 갖다 주셨으며 남편이 일하던 곳의 분들은 물론이고 내가 일하던 잡곡공장의 대표님도 이럴 수 있을까 싶게 많은 출산 축하금을 주셨다. 아이가 설 무렵에는 우리로선 엄두도 못 낼 고급스런 보행기를 사주시기도 하고, 이장님은 손자 장난감 사는 김에 같이 샀다며 아이 장난감을 선물해주시곤 했다.

이러한 모든 배려들이 정말이지 귀하고 드문 것이었음을 나는 나중에야 더욱 뼈저리게 알았지만 그 당시에도 ‘아 삶이 아무리 고되어도 이래서 살아갈 수 있는 거구나. 여기서는 상처많고 두려움 많은 나도 어쩐지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2년 정도 살고나니 원체 집이 낡았던 터라 천장에 물이 조금씩 새기 시작하고 쥐들이 많아져 나가야 할 상황이 되었다. 마을 여기저기를 알아보았지만 마땅한 집이 없었고 집을 사거나 짓기에는 돈이 턱없이 적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에 다른 시골에 시댁쪽 집이 하나 있다하여 그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 후에는 새로 이사간 마을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고 또 여러 다른 상황들로 하여 마음고생을 호되게 했는데 그럼에도 내가 여전히 시골을 좋아하고 시골에서 쭉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것은 처음의 그 경험과 기억들 덕분인 것 같다. 그 시절에 받은 배려와 애정은 남은 삶을 살아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베풀어주신 마음 씀을 간직해 나누기에도 족히 넉넉한 것이었으므로.

요새도 나는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친정 엄마보다도 그곳의 할머니들을 그리워하며 울곤 한다. 혹독했을 세월을 오롯이 몸으로 살아내신 내공... 무엇이 삶을 버티게 하고 사람을 사람답게 했는지를 겪어낸 분들의 지혜로운 힘살을 그곳의 이웃분들 특히 할머니들은 가진 것 없고 보잘 것 없는 나에게 몸소 베풀어 전해주셨다. 변화무쌍하고 예측하기 힘든 자연 속에서, 그저 사람과 뭇 생명에 대한 예의 하나로 말이다.

■ 현장 인터뷰

▲ 안씨부부가 자연농법으로 경작하는 밭은 자연의학적 측면에서 보면 사실상 보물창고였다. 잡풀들틈에서도 자생력을 갖춘 곡식과 채소들은 훌륭한 치료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부부의 밭은 사실상 보물창고

“저는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시골에서의 삶을 권하고 싶습니다”
충북 옥천군 안남면 도덕리, 귀농 7년 차인 안봉희 당선자(34세)를  만나러 갈때의 생각은 가벼웠다. 아직 젊은 편이니 ‘농촌에서 사는 모습이나 보고와야지’ 하면서 길을 나섰다. 그러나 도덕리에서 만난 이 젊은 농사꾼 부부의 생각과 삶은 기존 농사와 농업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뿐만 아니라 삶의 본질에 대해서도 나이답지 않게 근원적인 성찰을 하게하는 초월적(?)모습으로 긴 여운을 남기게 했다. 삶이란 무엇인가? 행복은? 인생의 성공은?

승자독식인 극단적인 생존경쟁의 초스피드 사회에서 부부는 너무나도 덤덤한 모습으로 느릿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10억 원의 부자도 돈을 더 벌기위해 안달이고, 100억, 1000억대의 재산가도 만족 못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일찌감치 터득했을까? 그리고 실천하고 있을까?

부부가 경작하는 1400평 볕 잘드는 언덕밭도 언뜻 보면 그냥 잡풀이 무성한 묵밭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물창고이다. 수십여 종의 채소와 곡식, 10여종의 허브, 15종의 과일나무들이 온갖 풀과 뒤섞여 자라고 있다. 밭을 갈지도 않고 김을 매거나 풀도 뽑지 않는다. 땅이 스스로 지력을 회복하여 좋은 먹거리를 제공해줄 때까지 조급해하지도, 서두리지도 않으며 5년이든 10년이든 기다린다. 그렇게 생명을 살리는 자연과의 공생을 이 젊은 부부는 문명의 편리한 많은 것들을 포기하면서, 실천하고 있었다.

그녀는 교사의 꿈을 안고 지방의 한 국립 사범대학을 다니다가 농업과 자연을 알게 되면서 미련없이 학교를 그만뒀다. ‘포기할 수 없는 가치’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자.
“강원도에서 태어나 9살에 서울로 이사를 와서 쭉 살았지만 외딴 산골에서의 기억이 깊이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사범대 교육학과에 진학해 막연히 시골교사를 생각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공동체와 농업, 자연의 중요성’에 대해 알게되어 진로를 바꿨습니다.

마을 분들은 물론이고 친정과 시댁 식구들 대부분 ‘도시에서 살던 젊은 사람들은 농사로 먹고 살기 힘들다’, ‘농약, 비료 안 쓰면 농사가 안되고 비닐 안 쓰는 건 말도 안된다’ 등의 말씀을 하셔도 워낙 처음에 배운 농사가 유기농업이고 뼈에 깊이 박혀 그런 주변의 염려들은 큰 고민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밭을 빌려 작목을 선택하고 판로를 고민하게 되면서 현실적인 문제와 농사관, 삶의 철학을 다시금 두루 살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유기농깻잎 하우스를 계획하기도 했는데 비교적 자본이 적게 들고 지역에서 기반이 잡혀 있고 지속적인 수입이 가능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알아보는 과정에서 사실상 처음 농사를 꿈꾸며 계속 마음에 담아왔던 ‘포기할 수 없는 가치’를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농사를 짓고 싶다’ ‘돈을 벌기 위해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농사를 짓기 위해 최소한의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결국 다품목 자연농으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수입이 많지 않을 것이기에 생활방식을 거기에 맞춰 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이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이상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저희에게는 사실 굉장히 현실적인 방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먼저, 농업 경영 능력과 자금이 일천한 상황에서 트랙터, 시설하우스, 인력, 비닐, 비료 등의 농자재를 도전하듯 투입하는 것은, 거기서 오는 심리적, 경제적 부담 때문에 과연 ‘무엇을 위해 농촌에 온 것인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현재를 살피는 일을 놓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니 도시에서의 인맥과 창의적 경험들을 활용해 기존의 지역 판로에 더해 나름의 방법을 함께 꾀하면 기계지양과 무비닐, 무농약, 다품목 소농의 방식이 전혀 생계유지에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생활에도 적용되어, 자가용을 팔고 버스를 타며 가능한 걸어다니는 것, 기계톱을 써도 좋지만 일반 톱으로 나무를 하고, 헬스클럽에 가지 않아도 공기 좋은 숲에서 좋은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자급 난방이 가능해졌습니다. 산에서 부엽토를 모으고 음식물 찌꺼기와 오줌을 모아 퇴비를 만들면 질 좋은 거름이 되었습니다. 나물을 뜯고 메주를 쑤는 등 먹거리를 자급하기 위해 이미 오래 전부터 어머니들이 해오고 있는 것을 배워 따라합니다.
이웃 분들의 농사짓는 모습을 보고 얘기를 들어보면 사실 수탈적 단작 위주의 농사 자체도, 그리고 농사로 먹고 사는 일도 참 힘들다는 것을 직접 마주합니다. 아무리 트랙터를 쓰고 인력을 사서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일해도 불안정한 농산물 가격 흐름에 따라 빚을 지기도 하고, ‘힘들게 농사지어서 비료, 농약 회사랑 병원만 먹여살린다’고 하는 자조적인 말이 틀리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회적 여건과 저희대로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보았습니다.

아직 시작이지만... 작년에는 무척 가물고 새로 집을 짓느라 작황이 많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연농의 경우 우선 땅 자체가 소생태계 조성을 통해 비옥지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흙이 살고 일정 수확량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합니다. 다행히 시골은 어떤 사람이라도 먹거리를 조금은 자급할 수 있고 소비의 유혹이 덜하기 때문에 도시보다 생활비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이 주는 심리적인 도움이 분명히 있으므로 균형감각을 회복하며, 돈을 버는 일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조율하고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봅니다.

사실 농촌, 농사가 더 낫다고 말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생명에 기본적인 햇볕, 깨끗한 물, 맑은 공기, 비옥한 땅이 어떠한 성장, 개발, 학력, 성공, 과학, 문화에 앞서 무엇보다 삶에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아이를 키우며 느끼기에 저는 특히나 젊은 사람들에게 시골에서의 삶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제 저희도 시작이어서 고민 중이고 기반이 잡히지 않아 무엇을 말하는 게 어설프고 어렵지만, 이렇게 얘기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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