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회 농촌 스토리 공모 당선작 - 박옥화 씨의 ‘추억 그리고 현재’

▲ 박옥화 씨는 7년간 부녀회장을 맡는 등 마을발전을 위해서도 누구보다도 열심히 앞장서왔다.

본지가 창간 10주년을 맞아 실시했던 ‘제1회 농촌 스토리 공모’에서 우수 작품으로 선정된 작품중 이번 호에는 당선작에 선정된 ‘추억 그리고 현재’의 박옥화 씨의 글을 싣고자 한다.
또한 현장 심층취재를 통해 미처 글로 표현하지 못한 그들의 숨은 뒷얘기와 감동을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한여름 팥죽같은 땀 흘려도
수확의 기쁨 이루 말할 수 없었죠

봄부터 가을까지
행복할 수 밖에 없는 추억들…

스물네 살 되던 해 가을, 언니의 중매로 만난 농촌 총각이랑 전통혼례를 올리고 농촌에서 삶이 시작되었다.
70년대 중반인 그때는 꼬불꼬불한 오솔길로 걸어가서 하루에 두 번 다니는 버스를 타고 읍내로 나가 장을 보고 장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이십리길을 걸어 힘겹게 다녔다. 그러니 어느 마을이건 발 방아와 절구 멧돌을 이용해 잔치나 제사 음식준비를 했고 명절이 돌아와도 아낙네들은 힘이 들었다.
처음 맞는 설명절에는 발로 찧는 디딜방아가 큰 고역이 되었다.

떡 방아를 한나절 찧어 고운 채로 떡가루를 쳐서 반죽덩이를 큰 가마에 받쳐놓고, 삼베 보자기를 깔고, 뚝뚝 떼어 안치고, 아궁이 때서 안반 위에 내다 놓으면 남자분들이 떡메로 탕탕 쳐서 찰진 떡 덩어리가 한 뭉치 떼어서 밀기름을 바르며 길게 상 위에 만들어 놓으면 어머님께선 떡살로 꾹꾹 눌러 각종 문양을 만드시고 잘라 함지에 담는다. 차지고 고소한 어머님의 인절미 맛을 긴 세월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
메밀을 많이 심는 강원도에서는 겨울이면 메밀국수를 자주 먹는데 메밀을 베어 털고 씻어 말려 키로 까불어 멥쌀이 되면 디딜방아에 찧어 고은 채로 쳐 가루를 만들 때 하루 종일 올라섰다 내려섰다 반복하며 발 방아를 찧고 나면 너무 힘이 들었다. 반죽을 해 국수틀에 넣고 장정 여러명이 누르면 잔잔한 국수가 팔팔 끓는 물에 들어간다. 5분 후에 건져 냉수에 행궈 동치미 국에 말아 먹으면 한겨울 최고의 별미가 된다.

한 해 겨울을 시댁에서 보내고 봄이 돼서 강 건너 마을 초가집으로 세간을 나왔다. 그 곳에 시부모님께서 남편 명의로 논 천평을 사 놓으셨다. 남편은 군에서 이발사로 일하다 제대한 사람이라 농사는 초보였다. 이웃 어르신들께 씨앗 심는 법, 밭갈이 하는 법, 농작물 가꾸는 법을 한 가지씩 여쭤가며 논에 못자리를 하고 이천 평 밭을 얻어 감자와 옥수수, 콩, 고추 등을 심었다. 그때 부족한 우리 부부에게 이웃분들이 ‘우리랑 어울려 하세’ 하시며 일을 가르쳐 주셨다.

소를 몰아 밭을 갈아주시고 감자 심고 옥수수 심는 것을 이 집 저 집 식구들이 모여와서 해주셨다. 흙벽 집은 오랫동안 방치돼서 진흙을 이겨 발라야 되고, 부뚜막도 깨지고 허물어지면 진흙을 이겨 붙이고 진흙물을 묻혀 맥질을 해야 뽀얗고 매끈한 상태가 유지된다. 쇠로 만든 솥과 가마는 기름 묻은 헝겊으로 닦으며 은근히 불을 때서 온종일 기름을 먹여야 쇳내 안 나는 반질반질한 솥이 되었다. 먹는 물이 귀한 언덕 위 마을이다 보니 샘물은 여러 집이 물동이로 물을 여다 생활을 했고 작은 개울은 마을 빨래터가 되었다.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는 일곱 집 가족들은 부모형제처럼 허물없이 지내게 되었다. 못하는 일이지만 열심히 하는 우리 부부를 마을 모든 분들이 한마음으로 도와주시니 그 고마운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우리 일을 하는 날은 아궁이에 불을 때서 콩탕을 하고 밥을 짓고 새참엔 국수를 말아 드리며 바쁜 하루가 지나갔다. 농약이 없던 그 시절엔 심어놓은 씨앗이 움트기도 전에 잡초가 먼저 나와 비라도 내리면 밭고랑이 푸른 잡초로 메운다. 두어 고랑 매다보면 해는 중천에 떠있고 팔다리는 아파온다. 새벽부터 나가서 애쓰는 우리가 안됐던지 이웃 아주머니가 오시더니 “백날 해봐야 소용없으니 내일 우리 김을 매러오면 다음 날 우리가 매줄테니…” 하셨다.

차마 미안해서 먼저 말을 꺼낼 수 없던 터라 우린 다음 날 김을 매드리고 그 다음날 마을 분들이 모여와 우리 밭에 김을 깨끗이 매주셨다. 한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가을까지 세 번에 풀을 뽑아줘야 결실을 볼 수 있으니 봄부터 여름까지 어떻게 지나갔는지 정신없이 살다보니 가을이 됐다.
좋은 이웃분들 덕분에 풍년든 가을걷이를 할 수 있었다. 논에서 벼가 잘 돼 먹을 양식을 빼고 팔아서 쓸 수 있는 여유가 생겨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릴 수 있었다. 내가 심고 가꾼 곡식이 여물어 수확을 할 때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내가 심은 배추로 김치를 하고, 호박이랑 오이로 찬을 만들면 무엇과 비견할 수 없는 맛이었다.

‘이 맛에 농부가 되는구나’ 싶다가도 한여름 흘린 팥죽같은 땀을 생각하면 콩 한 되, 깨 한 홉이 너무 귀하고 소중했다. 논과 밭이 먼데 있는 이웃집에서 저녁 먹고 남편은 지게 지고 초저녁에 갔다가 한밤중에 돌아왔다. 농사가 많은 댁에선 며칠동안 ‘투닥투닥 싸락싸락’ 도리개 소리와 키질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분들은 어울려서 1년동안 땔감을 해야했고, 잡목이나 소나무 가지를 잘라 칡으로 단을 묶어서 지게로 져다가 나무가리를 만든다. 이것을 시목가리라 하는데 식구가 많고 큰 집은 큰가리 두어 개씩 해야 돼서 남자들은 나무가 끝나고 초가 지붕을 씌워야 일년 고생이 끝난다. 남자들이 모여 이영을 뱃고 곱새를 틀고 새끼를 꼬아 한 집씩 돌아가며 지붕을 덮는데 그런 날은 콩을 멧돌에 갈아 두부를 하고 암탉을 잡아 막걸리를 내어놓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집에 가는 날은 정해져 있어 명절이나 제사, 어르신 생신 때 말고는 갈 일이 없다. 그 대신 생선장수, 옷감장수가 산골마을에 찾아오면 아무집이나 하룻밤 자고 가길 청했고 날이 저물어 낯선 행인이 찾아오면 사랑방 아궁이에 불을 때서 재워 보내는 게 당연한 관습이었다. 장사꾼은 미안하다며 고등어 한 손 척 내놓고 구워 드시라 하곤 길을 떠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 도와드리면서 산골에 음식을 배웠다. 여러집 식구들이 모여 음식을 나눠 드시고 옥수수 동동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시던 어른들은 스피아 깡통을 들고 오시고 목청 좋은 아주머니께서는 돌아가면서 소리를 하시고 장단 치는 분들은 ‘덩 더 쿵 덩기 덩기 덩 더 쿵’ 손장단에 신이 나서 아저씨 몇 분은 방가운데서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 내 또래 애 엄마들은 방 한쪽에 모여 앉아서 어르신들 노시는 모습에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콩나물~은 길러~서 뽑아나 먹자구 길렀지. 우리 부모는 날알 길러 남이나 주자구 길러 나아 어랑 어랑 어허야 쥔 애비 잡놈은 죽어 서어 상사 구랭이 되거라. 우리 부모는 죽어서 절간에 부처가 돼서요. 어랑 어랑 어 허야 가을 바람 소슬하니 낙엽이 우수수지고요오 귀뚜라미 슬피우니 고향생각이 나누나. 어랑 어랑 어허야 산수갑산 머루다래는 얼크러 설크러 젖는데 나는 언제 님을 만나 얼그러 설크러 질까나~ 아 어랑 어랑 어허야 어허럼마 디어라 내사랑~아~”
구경거리가 없으니 그분들을 보고 있으면 힘든 지난 일을 다 잊게 된다.

설 대목이 다가오니 방앗간에는 온종일 떡방아 찧는 소리가 나고 아낙네들의 웃음소리가 적막한 산골에 퍼져간다. 눈이 내리면 넉가래로 눈을 치우는 서걱서걱 소리가 들려오고 언덕 저편에는 아이들이 눈썰매를 타며 신나서 웃는 소리가 해맑게 들려온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니 뒷간에 겨울동안 인분과 재를 섞어놓은 거름을 퍼내서 감자 심을 준비를 했다. 비료가 귀하던 그 시절에 인분은 귀한 거름이었다. 갈아놓은 밭고랑에 한 웅큼 재를 놓고 감자씨를 심으며 가을에 고랑 가득 달려있을 걸 생각하며 온종일 허리를 구부리고 일했다.

▲ 마을 사람들과 도시민이 함께 어울리며 축제를 즐기고 있다.

봄이 지나서 무더운 한여름 이웃아낙들이 밤고기 잡으러 가자고 왔다. 남편들은 족대와 횃불 들고 우리는 양동이 들고 큰 강으로 갔다. 어둠이 내리면 고기도 잠을 자니 물 위에 떠 있는 고기를 족대로 떠서 그릇에 담으니 그때서야 팔딱팔딱거렸다. 우린 횃불을 들고 두어 시간 잡은 고기로 매운탕을 만들어 먹고 헤어져 내려오는 길에 하늘을 쳐다보면 수많은 별들이 아름답게 빛났다.
우리가 부치던 땅을 판다고 해서 폐물인 금 열돈을 팔아 밭 2,000평을 장만했다. 70년대 후반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라 우리 마을도 좁은 길이 신작로가 되고 전기도 들어왔다. 그리고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집집마다 슬레이트 지붕을 바꾸는 집이 많아졌다. 우리집도 금반지 계를 타 지붕을 슬레이트로 교체했다. 그리고 경운기 한 대를 구입해서 50리가 넘는 방동약수터에 이웃분들 짐칸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갔는데 비포장먼지가 뽀얗게 날려 눈을 뜰 수 없었건만 어른들은 이런 호사가 어디 있겠냐며 즐거워하셨다.

바쁜 일이 대충 끝나면 집집이 키운 닭을 잡고 커다란 양은 솥을 지게에 지고 강가로 나가서 나무그늘에 멍석을 깔고 불을 때서 점심을 먹고나면 남자들은 족대로 고기 잡고, 여자들은 다슬기를 줍고, 아이들은 자갈모래밭에서 신이 나서 논다.
옆집에 TV를 샀다. 마을 사람들은 저녁이면 자두며 복숭아 등을 가져와 생전 처음 연속극을 보고 ‘전설의 고향’도 보았다. 이듬해에 냉장고도 사놓은 집이 있어 더운 날 더위를 식혀줬다.
큰 아이가 세 살이 되던 해 봄, 난 둘째 아들을 출산했다. 아이가 신기한지 큰 아이는 옆에 앉아 있다가 애기가 울면 나를 찾았다. 세월이 지나 아이가 커서 걸음마를 하니 큰 애는 더 바쁘게 집과 밭을 뛰어다녔다. 아이들이 자라서 학교에 다닐때쯤 비료도 있고 농약이 나와 농사일이 많이 수월해 편한 세상이 됐다.

큰 아이가 중학교 들어갈 때 그동안 살던 집에서 큰 길 옆에 논을 사고 집을 짓고 이사를 갔다. 집을 짓는 동안 모든 마을분들이 거들어 주셔서 그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방을 많이 만들어 낚시하러 오는 손님을 상대로 민박을 시작했다.
마을에선 청년회를 만들고 부녀회를 조직했다. 이전엔 마을에 경조사가 있어도 각 반원들이 모여서 일했는데 지금은 마을 전체가 모여 일을 한다. 나는 부녀회장을 맡게 되었는데 회원모집이 제일 힘들었다. 어른들 모시고 사는 며느리들이 시부모님 반대로 못 나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른들 한 분씩 허락을 맡아 1년이 지나니 회원은 16명이 되었다.

우리는 봄·가을 마을 대청소를 하고 큰 강가에서 장마에 떠 내려온 쓰레기를 줍고 깡통을 주워 기금을 만들어 경로잔치를 해드렸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폐비닐, 비료포대를 주워 불우이웃 돕기 성금도 내며 새마을부녀회원으로서 자랑스러웠다.
다음해 여름 래프팅 대회가 열리게 되고 군청에서 행사장 식당을 해보라는 제안을 받고 생전 처음 소머리국밥으로 장사를 했다. 청년회에서 필요한 집기들을 날라주고 회원들은 반찬과 국 준비를 했다. 서빙하고 계산하고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가고 여러분들에게 격려와 칭찬을 들으니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 후 우리는 겨울이면 빙어축제에서 향토음식인 수수부꾸미, 손두부, 메밀전병과 마을 대표메뉴인 느타리탕수까지 했다. 몇 년전 태안기름유출때도 새벽 3시에 버스 타고 가서 기름때를 닦고 밤중에 돌아왔다.

나도 어느새 60살이 훌쩍 넘은 중년이 되었다. 가난한 세월을 뒤로 하고 집집마다 차가 있고 인터넷, 컴퓨터에 각종 전기 제품이 들어와 살기좋은 농촌으로 변했다.
마을에는 펜션과 민박집이 많아 여름이면 피서 오는 손님이 편하게 쉴 수 있는 마을이 되었다. 옥색빛 푸른 내린천에서 래프팅을 하고 번지점프에 산악 오토바이도 탈 수 있는 레포츠 천국이 되었다.
농어촌 잘 살기 운동과 테마마을 조성 등 마을 발전을 위해 이장님을 비롯해 모든 분들이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눈부신 발전을 했다. 마을영농조합이 결성되고 도정공장을 짓고 기름 착유기도 들여왔다.

3년 전부터 마을 도정공장에서는 마을작목반에서 생산하는 차조, 수수, 찰옥수수, 서리태, 들기름을 판매한다. 지난 가을 제4회 잡곡축제 때는 인제군에서 활동 중인 예술인 단체들이 모두 오셔서 축제를 빛내주셨고 마을 30여 분이 한달동안 연습한 도리깨한마당은 외지에서 오신 분들까지 함께 참여하며 즐거운 축제가 되었다. 서울과 이웃마을에서 오신 손님들로 작은 마을이 이틀동안 정신없이 지나갔다.
여름에 나는 찰옥수수, 감자, 콩, 풋고추 등은 최고의 맛을 자랑한다. 학교를 개조한 숙박시설과 새로 지은 체험관에서는 사계절 손님을 받고, 두부체험·떡체험·비누체험·목공예체험·김치체험 등을 할 수 있다.

올해도 풍년이 들어 많은 분들이 우리마을 잡곡과 농산물을 저렴하게 드실 수 있으면 좋겠다.
마을엔 둘레길도 있어 맑은 공기 마시며 인적 없는 산길을 걸어도 좋고, 내린천 맑은 물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물고기를 잡다보면 세상 모든 근심이 다 사라진다.
저녁엔 매운탕 만들어 지인들과 술 한 잔 하고 밤하늘에 별빛도 감상해 본다. 십 수년 전 내린천댐을 만들려고 할 때 많은 분들이 반대에 동참해서 지금 우리는 아름다운 산과 깨끗한 강물을 바라볼 수 있다. 그때 애쓰신 모든 분들게 감사드린다. 고생하신 고마운 그분들도 언제나 즐겁고 행복하시길 바란다.

 

■현장 인터뷰

▲ 농사일이 힘들긴 했어도 남편이 있어 즐겁고 행복했다며 남편 윤영태 씨의 손을 잡았다.

“글로써 상을 타는 모습 어머니가 보셨으면
  아주 많이 좋아하셨을 것입니다”

“못 배워 한이 됐던 지난 세월 이제 다 풀렸다”
 7년간 부녀회장 등 맡으면서 훌륭한 리더십 발휘
 마을 발전과 잘사는 마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앞장

“제가 이렇게 글로써 상을 타는 모습을 새어머니가 하늘에서라도 보신다면 많이, 아주 많이 좋아하셨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보셨으면…”
박옥화(63세) 씨의 내력을 강원도 인제군 내린천은 이미부터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오늘같은 날이 오리라 예견하고 그동안 침묵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한 농촌 여성의 흔치않은 삶으로만 보기에는 그녀의 유년은 너무 지난했고 그 세월의 내상만큼이나 아픈 상흔을 지금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오랜 농사일로 양쪽 무릎관절이 다 닳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일을 하거나 생활하는데는 불편하지 않더라도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기에 살면서 늘 조심해야 한다. 유달리 농촌여성들이 이른 나이에 척추와 무릎이 망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몸을 돌보지 않고 살아온 박 씨도 피해가지 못한 것이다. 90세, 100세 시대에서는 아직 한창인 50대에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이 허리뼈에 굵은 나사못을 박고 무릎에 인공관절을 심는 것은 불공평하고 가슴 아픈 일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요즈음은 이런 중증의 허리, 무릎 질환도 비수술적 치료법이 개발돼 외과적 절개술의 부담을 상당수 줄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책으로 써도 몇 권은 될 것이라는 그녀의 삶을 짧은 한두시간에 얼마나 들을 수 있으며 또 기록할 수 있을 것인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기회가 되면 후일 다시 듣기로 했다.
초등학교조차 다닐 수 없었던 박 씨는 열 살 무렵 새어머니가 가르쳐주는 글자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물길러가서 손가락으로 우물에다  글자를 써보기도 하고, 부엌 아궁이 앞에서 불을 때면서는 타다 남은 나무 검댕으로 부엌 바닥에 쓰고 또 썼다. 그렇게  배우고 익힌 글자로 글을 써서 당당하게 당선됐다.

“배우지못해 한이 됐던 지난 세월이 이 상으로 이제 다 풀렸습니다. 돌아가셨지만 글을 깨우치게 해주신 어머니께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돌아가야했던 험한 산에는 터널이 뚫리고, 배를 타야했던 깊은 강에는 다리가 놓여 ‘인제가면 언제오나’며 유배의 땅처럼 인식됐던 강원도 인제도 서울에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세상이 변해 승용차로 불과 세 시간 남짓 거리였다.
박옥화 씨는 한계령에서 내려오는 하추 계곡물과 인제군 기린면 미산리 방태천 쪽에서 내려오는 내린천 물이 합쳐지는 강기슭에서 부업으로 ‘거무석 펜션’을 운영하며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내린천물이 소양강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말하자면 소양강  최상류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녀의 ‘추억 그리고 현재’는 개인적 삶과 강원도 오지 산마을의 60~70년대 모습이지만 그 기록은 다른 한편으로는 사라져가는, 잊혀져가는 우리농촌의 역사다. 기억하고 되새겨야 하는 시대의 유산이기도 하지만 가난을 극복하기위해 허리뼈와 무릎관절이 망가지도록 열심히 살아온 세대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거창하고 삐까번쩍한 사람들의 흔적만이 대단하고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민초들의 고달팠던 삶도 충분히 기억할만한 가치가 있고  또 기억해야 한다. 백성이 하늘이고, 백성이 역사이기 때문이다.

박옥화 씨는 아홉 살에 30리(12km) 떨어진 학교에 입학했지만 화전민의 삶에서 생존 때문에 한달에 열흘도 채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듬해에 어머니가 병으로 눕게 됐습니다. 한달에 열흘정도 가던 학교마져 갈 수 있는 상황이 못됐지요. 어머니는 끝내 세상을 떠나시고 밑으로 네명의 동생들을 제가 키우게 됐습니다. 얼음을 깨서 빨래를 하고 생후 8개월 된 동생은 등에 업고 3살 된 동생은 안아주고 하면서 살았습니다”

박 씨에게 학교는 그것이 끝이었다. 그나마 많지도 않은 전재산은 모두 털어 어머니의 병으로 지게 된 빚을 정리하고 그때부터 동생들을 데리고 더 지독한 화전민의 세월을 보내야했다. 열 살 남짓 어린아이가 세 살, 다섯 살, 일곱 살, 아홉 살 터울의 네 동생들을 돌보면서 밥하고 빨래하고…
“그러다가 새어머니가 들어오시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하는 큰 일은 덜게 됐지만 대신 화전밭을 일궈야 하고 산속을 헤메며 나물을 뜯어다 죽을 쑤어 양식을 보태야 했습니다”
그렇게 2~3년을 보내는 사이 박 씨는 한글도 모르는 문맹이 되고 말았다.

“그때 새어머니께서 그런 사실을 알고 객지에 나가게 되면 집에 편지라도 써 보낼 수는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대로는 안되겠다’면서 사촌오빠의 몽당연필을 얻어와 회가루 포대를 찢어서 글자공부를 시키셨어요”
박 씨는 새어머니가 알려주는 글자를 잊을까봐 물 길러 나가서 우물에다가 손가락으로 글자를 써보고 부엌아궁이 앞에서는 타다 남은 나무 검댕으로 부엌 바닥에다 글씨를 쓰면서 글자를 잊어버리지 않을려고 발버둥쳤다.
“어느날 그런 모습을 아버지한테 들켰습니다. ‘계집애가 지(제)이름자만 알면 됐지 무슨 공부냐’며 큰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모질게 글을 깨우친 박 씨는 그후 인제를 떠나 대처의 친인척집을 옮겨다니며 10여년 지내다가 결혼을 하면서 다시 고향 인제로 돌아왔다.
마을로 돌아온 박 씨는 지난 40여 년동안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고 마을 일에도 앞장섰다.   마을 부녀회장을 7년간이나 맡으면서 훌륭한 리더십과 능력으로 산골 오지 화전마을을 살기좋은 부자마을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박 씨는 “그때 깨우친 한글로 쓴 글로 당선이라는 영광을 얻고 보니 배우지못해 한이 됐던 지난 세월의 맺힌 것들이 이제는 다 풀렸다”고 말했다.

자식들도 잘 자라줬고 내린천 상류 전망 좋은 강가에 펜션과 집이 있고, 수십마지기(6천여평) 전답도 있어 그녀는 이제 남부럽지 않은 부농이다. 농사일이 힘들고 어렵기는 했어도 남편 윤영태(67세) 씨가 있어서 ‘즐겁고 행복했었다’며 남편의 손을 잡는다.

경기도 성남에서 살고 있지만 며느리가 시어머니인 자신에게 ‘너무 잘한다’며 칭찬하기도 한다.
그녀는 지금도 새어머니가 깨우치게 해준 글로 일기처럼 삶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어쩌면 글자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쓰고 또 썼던 그때의 습관이 몸에 밴 이유인지도 모른다.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하추리 523ㅡ2번지 내린천 상류 ‘거무석 펜션’에 가면 여전히 추억속에서나 있을법한 아름다운 산과 깨끗한 강물,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의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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