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회 농촌 스토리 공모 당선작 - 김수희 씨의 ‘엄마나무’

본지가 창간 10주년을 맞아 실시했던 ‘제1회 농촌 스토리 공모’에서 우수 작품으로 선정된 작품들을 이번 호부터 순차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현장 심층취재를 통해 미처 글로 표현하지 못한 그들의 숨은 뒷얘기와 감동을 전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가장 존경하고 닮고 싶었지만
힘든 엄마처럼 살긴 싫었죠…

▲ 친정엄마 진미자 씨의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건강을 되찾은 김수희 씨는 ‘엄마에게 한없이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든든한 나무는
절대 내 앞에서 울지 않으셨다.
내가 나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해주셨다. 

“엄마! 아직 멀었어? 12시 넘었는데. 손 시렵지? ”
“아니야, 괜찮아 얼른 들어가서 자고 있어. 엄마 괜찮으니까 먼저 들어가서 자고 있어”
싫지만은 않은 시간이었다. 엄마는 오롯이 내 것인양, 춥지만 난 늦은 밤까지 수북히 쌓인 빨래와 씨름 하시는 엄마를 조잘 대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 그 많은 빨래를 비비시고 마지막엔 짤순이로 짤 수 있었던게 그나마 참 다행이었다. 우리집은 대식구였고 농촌은 늘 그러하듯 주위에 친척분들이 모여 계셨다.
맏며느리신 엄마는 낮에는 밭으로 논으로 일하시고 밤 늦게까지 또 그렇게 일하셨다.
동네에서 일 제일 빨리 잘하는 사람으로 꼽히시는 분이셨다. 난 내가 철이 들기 전까지 우리 집은 무척 가난한 집인 줄 알았다. 아빠는 공무원이셨지만 엄마는 항상 일하시고 농한기가 되면 만두를 만들어 파시든 시장에서 판매를 하시든 우리 옆에 계신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국어시간에 내 이상형을 적어 보는 시간이 있었다.

음... 짝꿍은 옆에서 “남자는 키가 우선 커야해. 그리고 얼굴도 잘생기고. 넌 뭐라 적었어?”
그리고 내 노트를 보더니 킥킥 거리기 시작했다
“첫째, 농촌에 살지 않는 남자 둘째, 장남이 아닌 남자”이거면 된다. 너무 현실적인가? 난 이거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여자인 우리 엄마는 내가 같이 있고 싶은 순간에 다리에 화상을 입고, 울고 있을때도, 부모님이 학교에 오셔야 할 때에도 엄마는 늘 밭에 계셨다.
집에 오시면 녹초가 되셔서 큰 사발로 물을 들이 켜시고 집안일을 또 시작 하셨다. 엄마께 할 말이 너무도 많은데  학교에서 친구하고 싸운일, 동생이 저지른 일, 등등 난 빨래 하시는 그 틈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엄마는 가장 존경하고 닮고 싶은 사람 이었지만 난 절대 엄마처럼 살기는 싫었다. 엄마는 너무 힘들어 보였다.
25살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이상형에 100% 충족은 안되지만 우선 시내에 사는 사람이다 농사일이라곤 해본 적 없는 장남이긴 해도 큰집이 아니라서 대가족도 아니고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
“그래 이정도면 괜찮아 이제 결혼해서 분가하면 더 이상 엄마 따라 밭에 가지 않아도 된다.”
친구들과 실컷 놀다 집에 들어가면 엄마 잔소리에 못 이겨 과수원으로 따라간다. 일을 하다 나뭇가지를 붙잡고 졸다 혼나고 새참 준비하다 졸아서 머리카락이 불에 그슬린 적도 많았다. 실컷 놀고 싶고 자고 싶은 나이에 왜 촌구석에 살아서 이럴까? 한편으로 결혼은 나의 피난처 일 수도 있었다.

26살 결혼 후 임신을 했을때 심한 입덧으로 엄마 음식이 너무 그리웠다. 착한 심성을 가진 남편은 회사일이 끝나는데로 쉬는 주말이면 장모님을 따라 밭으로 갔다.
소독도 하고 삽질도 하고 나무도 심고 예초기질도 하였다 공무원이신 아빠는 과수원에 화학비료와 제초제는 절대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면서 사위가 올적마다 풀을 깎으셨다.
남편은 싫은 내색 없이 젊은 힘으로 젊은 피로  열심히 돕는 게 난 고마웠다.
그냥 처갓집 돕는 것 딱 그거면 됐다. 연이어 둘째도 딸을 낳았을 무렵 언제나 강한 엄마께서 허리 협착증 수술을 받게 되셨다. 너무도 젊으신 나이에 엄마는 사서 고생을 하시더니 몸은 너무 많이 망가지신 것이었다.

엄마는 더 이상 농사일을 하지 못하시는 게 가장 큰일이라 생각하셨다.
회사 다니면서 대리운전을 하는 신랑의 성실함으로 회사 다니면서 농사일을 하라고 넌지시 제의 하셨다..“ 힘들게 뭔 농사를 지어? 할 사람 없으면 그냥 밭을 팔던지 우리가 뭘 하겠어?”
농사의 ‘농’자도 듣기 싫었다. 하지만 엄마가 아프시니 당장 할 사람이 없으니…
남편은 한번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신혼집을 정리하고 친정으로 들어왔다.  
“자식을 둘이나 낳고 어른으로 사는 게 보통일이 아니구나”라고 느끼면서 힘든 농사일에 대한 내 마음도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졌는지 아니면 “주업이 아닌 부업이니”라는 안도가 있었는지, 그렇게 우리 남편의 투잡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농사는 결코 호락하지 않았다. 뿌린 만큼 거두듯 농사를 부업으로 생각 했던게 우리에게는 큰 오산이었다. 좀 더 손쉬운 방법으로 일하려고
소독 방제기도 구입 했지만 기계값 갚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러던 중 뱃속에 또 하나의 생명이 생겼다.
딸이 둘이나 되는데 이렇게 또 터울이 없으면 같은 성별일 경우가 많다는데...
“아! 또 딸일텐데. 엄마 허리 아프신 것도 우리 애들 봐주시느라 힘드셔서 그럴텐데 또 어떻게 낳아”
우린 엄마 앞에 무릎 꿇고 그냥 둘만 잘 키우겠다고 말씀드리자 “그럴 생각이면 너네 애들 다 데리고 나가라 이집에 들어온 이상 절대 그럴 수 없다!! 너네가 뭔데 경이로운 생명을 함부로 하려해? 그리고 딸이던 아들이던 걱정 말고 낳아라. 내가 힘 닿는데까지 도와주고 키워줄테니”

아이들 셋이라는 부담감 보다는 딸이 셋이 될 것 같은 두려움에 더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 어차피 던져진 주사위인데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아기 성별이 결정 될 때 “보이네요” 이 한마디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성별에 관심없다고 하던 남편은 시댁으로 친정으로 전화를 돌려댔다.
이제 결혼한 여자의 할 일을 다 한 듯  정말 열심히 살기만 하면 됐다.

2012년 1월 자꾸 속이 쓰려 미뤄왔던 검사를 해보기로 했다. 검사 중 선생님은 위에 피가 많이 나서 검사가 안되니 이틀 후 보호자 동행해서 다시 나오라고 말씀하셨다. 나이도 젊은데 뭔 큰일이야 있겠냐고 생각 했지만 보호자동행 이란 말에 불안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일주일 후 병원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젊은 나이에 위암 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내 나이 32살 만으로 이제 31살. 아이들은 3살 5살 7살.

“걱정하지 말고 수술하면 살 수 있으니 얼른 큰 병원에서 최대한 빨리 수술 하세요. 젊은 사람은 전이가 빠르니 무조건 빨리 수술 하세요!”
서울의 메이저급 병원은 죄다 예약을 했다. 수술 날짜가 잡히기 전까지 9번의 내시경검사, 또 검사 가는 병원마다 의사선생님을 붙들고 울었다.
“선생님 살 수 있는 거지요? 제발 빨리 수술 좀 해주세요. 제가 어린 아이가 셋이에요... 저 살아야 해요.”
수술 날짜는 잡혀졌고 기다리는 시간엔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암세포가 점점 내 목을 죄여 오는 기분이었다.

종양의 위치가 위장의 상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나는 위를 전부 절제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 위가 없이 어떻게 사는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살 수만 있으면 뭐든 해야 했다.
애를 셋이나 낳았는데 수술 받는 고통쯤이야 자고 일어나면 끝나 있을 거야!
자고 일어나니 정말 끝나 있었지만 밀려오는 고통으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면 너무 아파서 차라리 정신없이, 아니 정신을 잃고 자는 게 나았다.

사람의 몸이 신기하고 세포 하나하나가 신기했다. 복부에 긴 흉터는 시간이 흐르면서 아물고 아픈 통증도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좀 살 만할 때 또 다른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년의 항암치료 일년동안 경구 투입하는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이걸 해야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고 한다.
약이 내 몸에 조금씩 쌓이면서 부작용은 시작됐다. 입안에서 피가 나고 손끝 발끝의 허물은 죄다 벗겨지고 먹을 수가 없게 계속되는 구토와 설사, 버티기가 너무 힘들었다.

이런 나를 붙들고 남편은 같이 울었다. 엄마가 좋아서 달려오는 그 귀한 아들을 안아 줄 힘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친정엄마는 나무이고 하늘이셨다. 수없이 손이 가는 어린 아이들의 엄마이자 남편의, 나의 기댈 수 있는 나무. 내가 왜 이런 운명으로 살아야 하는지 뭘 잘못 했는지 수없이 되뇌여 봤지만 그냥 버티는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나를 나무는 쉬게 해주시고 산이건 들이건 좋다는 건 모조리 해주셨다.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오심과 구토가 심했을 때 쌉싸름한 지칭개국을 해주셨다. 한술도 못 뜨던 나는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그 후로 엄마는 냉장고에 지칭개를 가득 채워 놓으셨다. 농담도 잘 못하시는 엄마가 조금이라도 기분좋게 재밌는 얘기를 해주시고 아픈 허리였지만 아이들을 업어 주시고 안아 주셨다. 딸자식 시집보내면 끝인데 손주 셋을 다시 키우고 병든 딸 수발 까지…
못난 딸은 엄마께 “엄마 그래도 참 다행이야. 내가 아프니 다행이야. 애들 아픈 것보다 내가 아픈게 다행이지”
참 못난 딸이다. 엄마께는 내가 자식인데 내 자식만 생각하고 엄마께 그렇게 말했으니 참 못난 딸이었다. 든든한 나무는 절대 내 앞에서 울지 않으셨다. 내가 나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해주셨다.

1년 동안 항암치료를 잘 버티고 1년, 2년, 3년, 4년이 지났다.
6개월에 한번씩 정기검진을 할 때쯤은 온갖 신경이 곤두서고 덜덜 떨리지만 이렇게 버티고 살고 있다.
남편은 적성에 딱 맞는 농사로 전업을 했다. 내 건강을 신경 쓰듯이 나무도 그렇게 가꾸고 돌본 덕에 우리농장의 사과·복숭아를 찾는 사람들은 점점 늘고 있다.
난 이제 과수원에서 조금씩 일도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피하고 싶었던 농사가 나를 내 가족을 먹여주고 살려주고 있는 것이다. 어릴 적 내가 본 엄마처럼…

난 부모님께 갚을게 너무 많은 자식이다. 내 꿈 중 하나는 늘 부모님께 효도하기 였다.  
‘직장 다니면서 효도 해야지’했는데 결혼하고, 결혼해서 효도 해야지 했는데 아이 낳고, 이 효도는 숙제도 아닌데 계속 미루고 있었다.
아니 난 효도가 뭔지 모르고 있었다. 그저 물질적으로 만이 아니고 건강하게 아이들과 행복하게 잘 사는 것. 지금의 나에게는 이게 최선의 효도이다. 난 내 인생을 원망하지 않는다. 너무 감사한 것 뿐이다.

특히 내가 버틸 수 있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신 엄마나무! 엄마의 딸이라 너무 감사하다.
엄마나무처럼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든든한 나무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난 엄마처럼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나무의 잎은 조금씩 떨어지고 이제는 앙상해져 있다.
이제 내가 엄마나무가 되어 우리 사랑하는 엄마께 받기만 한 잎들을 나눠 드려야 겠다.
“사랑하는 엄마 저의 나무가 되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건강하게 오래도록 저희 옆에 계셔 주세요”

 

■ 현장인터뷰

▲ 김수희 씨 가족은 밝고 화목했으며 ‘엄마나무’의 사랑으로 자라고 있는 아이들도 활기찬 모습이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가 됐으면…

위암 딸 살린 ‘엄마나무’의 기적, 건강하고 밝은 긍정의 아이콘
엄마의 희생과 사랑에 대한 헌정의 글, 뜻밖의 선물 돼

“...선생님, 저 살아야해요. 제게 어린아이가 셋이에요. 저 살 수 있지요?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3살, 5살, 7살. 아직은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올망졸망 어린아이를 셋씩이나 둔 32세 젊은 엄마가 위암3기 진단을 받고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 젊은 엄마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어린 세 아이들이 눈에 어른거려 ‘반드시 살아야 한다’며 의사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김수희 씨는 결국 위암을 극복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않을 어린 세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가정으로 무사히 생환했다. 그녀는 지금 누구보다도 밝고 건강하고 긍정적이다. 세 아이의 엄마이자 ‘수희네 농장’주인 37세 김수희 씨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였으며 큰병을 겪은 사람 같지 않게 밝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지난 5월2일 정기검진에서도 아주 깨끗한 결과를 통보받았다. 지난해 여름에는 직접 수확한 복숭아 98상자를 트럭에 싣고 길거리에서 불과 1시간만에 다 팔아 치우기도 했다.

김 씨를 살린건 물론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현대의학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지만  머리카락이 빠지고 손끝 발끝 허물이 다 벗겨지고 입안이 헐어 피가 나면서 음식은 고사하고 물 한방울 삼키지 못하고... 계속되는 구토와 설사... 그런 투병과정을 견딜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보살펴준 친정엄마 진미자 씨(60세)와 그리고 화목하고 따뜻한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항암제 치료중에는 엄청난 신체적 고통과 재발·전이에 대한 두려움으로 밤마다 남편과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그때마다 엄마는 지극정성으로 저를 보살펴 주셨습니다.”

척추관 협착증이란 중증의 척추질환을 앓아 허리뼈에 굵은 나사못이 8개나 박혀있어 거동이 불편하면서도 딸을 살리기 위해 진 씨는 온 산으로 들로 헤메고 다녔다.
생환한 딸은 그래서 엄마에 대해 고마우면서도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김수희씨의 ‘엄마나무’는 그런 친정엄마의 희생과 사랑에 대한 헌정의 글이다.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하고... 오히려 암까지 걸려 온 자신을 헌신적으로 돌봐준 친정엄마에 대한 감사의 글인 것이다. 그렇게 쓴 ‘엄마나무’는 2016년 5월8일 어버이날을 며칠 앞두고 당선이라는 뜻밖의 선물로 김 씨에게 돌아왔다.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선물이었어요. 저와 엄마는 물론 우리가족 모두에게 큰 위로와 용기가 되고... 글에서는 동생얘기는 하지 않았는데 막내 남동생이 2014년 9월에 제가 위암선고를 받은 나이인 32세에 췌장암으로 몇 달만에 하늘나라로 갔어요. 그 충격으로 아버지가 쓰러지시기도 했었고, 엄마도 장간막 림프절로 병원에 입원하고 그러셨어요. 정말 효심이 깊고 착한 동생이었는데...”
김 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서 손주를 안고 있던 친정엄마 진미자 씨의 눈가도 붉게 충혈되면서 눈물이 맺혔다.

장녀를 살려놓고 한숨 돌리는가 했는데 요리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가 있던 막내가 덜컥 췌장암에 걸려 불과 몇 달만에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었다.
진미자 씨는 그 막내 아들의 뒷수발을 장녀 김수희씨가 다했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수희가 마지막 순간까지 동생을 보살폈어요. 동생의 대소변까지도 맨손으로 다 처리하면서 씻겨주고 닦아주고... 막내아들은 죽으면서도 일본에서 아르바이트로 번돈으로 가족들 선물 다 챙겨주고 필요한 것들 사놓고, 부모한테도 ‘죽는 것은 괜찮지만 효도를 제대로 못한 것이 가슴아프다’고 하면서 하늘나라로 갔어요”

그런 막내아들을 가슴에 묻었으면서도 엄마나무는 가족, 특히 자식들 앞에서는 절대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슬픔과 눈물을 안으로 삼켰다.
그러나 딸의 당선소식을 듣고는 “기뻤지만 막내아들이 생각나 마냥 좋아할 수 만은 없어 눈물이 쏟아졌다”고 말했다.
김 씨는 당선이 ‘운이 좋아서’라고 겸손해하지만 운도 준비된자라야 받을 수 있다. 행운도 그녀에게는 우연이 아니었다. 친정엄마의 척추관 협착증, 자신의 위암, 막내 남동생의 췌장암, 친정아버지의 뇌경색, 친정엄마의 장간막 림프절.

잇따른 불행에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해 냈기에 행운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은 가족 간의 화목과 사랑이 얼마가 큰 힘이고 희망이 될수 있는지를, 그 사랑과 화목은 어떤 불행과 어려움도 이길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해주고 있다.
‘엄마나무’의 그늘에서 자란 그녀처럼 대를 이어 사랑을 듬뿍받고 자라고 있는 그녀의 아이들도 활기차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화목하고 따뜻한 가정은 아이들의 훌륭한 자양분이다. 슬픔이 폭풍처럼 지나갔음에도 이들 가정에는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쳤다. 이제 그녀에게 또 다른 바람이 있다면 힘들고 어려운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해주는 일이다.

아직도 정기검진을 받을때면 재발·전이에 대한 두려움으로 덜덜 떨리지만 당선이라는 선물로 큰 위로와 용기를 얻게됐다며 그 용기와 희망을 다른 사람들과도 나누겠다고 말했다.
그녀와 가족들을 평생 감싸주고 보듬어주던 엄마나무의 무성한 잎들도 세월이 흐르면서 한잎두잎 떨어져 이제는 헐벗은 나무가 돼가고 있다.
“이제는 엄마가 저와 가족들에게 해주셨듯 제 아이들과 부모님들께 ‘엄마나무’같은 잎이 될 것입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엄마께 받은 사랑을 돌려 드릴 수 있는 나뭇잎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살 것입니다.”

김수희 씨의 ‘엄마나무’는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지만 그러나 개인이 건강하고 행복해야 사회 국가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면, 김씨의 개인적인 가족얘기는 너무도 사회적이고 국가적이다. 친정엄마 진미자 씨는 자식과 가족을 위해 끝없이 희생하고 헌신하는 한국농촌 어머니들의 보편적 모습이였고 그런 농촌여성들의 희생과 헌신은 70~80년대를 거치면서 오늘날 대한민국을 있게 한 정신적·경제적 토양이 된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엄마얘기만 했는데 사실은 아빠가 중심을 잘 잡아주셔서 우리가족이 이렇게 버틸 수 있었습니다. 아빠께도 감사하고.... 부모님이 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고 아이들에게는 좋은 엄마, 남편에게도 좋은 아내가 되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당선 통보를 받기 전 뜬금없이 꿈에 막내동생이 나타나 ‘누나, 상타네’ 했었는데 ‘진짜 상을 타게됐다’며 슬쩍 눈물을 훔쳤다.
김 씨가 암과의 사투를 벌이는 사이 세 살, 다섯 살, 일곱살이던 아이들은 어느새 훌쩍 커 7살, 9살, 11살로 부엌에서 마당에서 엄마의 심부름을 하며 엄마를 돕고 있었다. 훗날 김 씨의 세 아이들도 할머니 ‘엄마나무’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에 대한 ‘엄마나무’의 사랑과 헌신을 기억할 것이다. 굳건히 중심을 잡으며 집안을 이끌고 있는 친정아버지는 딸을 위해 또 텃밭에서 온갖 채소들을 가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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