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창덕 경영지도사

▲ 임창덕 경영지도사

"쌀은 공산품처럼 취급받지 않고
생명산업이라는
부가적인 가치를 더해서
‘제값’으로 유통되는
생태계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최근 농업과 관련이 없는 모 대기업의 쌀 도정업 진출 추진으로 농업계의 반발을 사고 있다. 해당 업체는 미곡종합처리장(RPC)에서 원료곡을 구입해 도정하는 것으로 대량 도정에 따른 비용 절감과 마케팅을 통한 쌀 판매를 촉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쌀 값 하락 등으로 RPC의 적자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대형 RPC를 추가로 건설하겠다는 것과, 1인당 쌀 소비량이 30년 전 소비량과 비교해 절반 수준이고 매년 소비량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어떤 마케팅을 통해 판매를 촉진한다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몇 년 전 대기업에서 농업 유리온실 사업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당시 대기업의 유리온실 사업에 대한 농업계 반발이 이어지자 “국내 농가에서 일반적으로 생산되는 분홍빛 토마토가 아닌 업소용 유럽계 붉은 토마토를 키운 뒤 일본에 90% 이상을 수출할 계획”이라고 설득했지만 불매운동 등 반대의 목소리가 커지자 결국 유리온실 사업을 포기했다. 당시 스마트 농업의 필요성, 고령화돼 가는 농촌 현실에 맞는 농업의 규모화 등 경쟁력을 확보를 위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개인들이 살아가는 골목상권까지 대기업 자본이 진출하고 사회 양극화를 줄이고 소상공인을 보호하자는 차원에서 추진한 대형마트 영업규제에 반발해 헌법소원까지 내는 대기업의 모습에서 본 것처럼 대부분의 국민들은 신뢰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헌법은 자유시장경제 원칙을 기본적으로 존중하지만 부(富)의 편중 같은 부작용을 막고자 국가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일명 경제민주화와 관련돼 있다. 대기업의 골목상권 진출이 지역상권의 붕괴뿐 아니라 전체 지역 경제에 악영향을 주는 사례를 보면서 식량안보와 식량주권과 관련된 생명산업에까지 자본력과 경쟁원리를 앞세우지 않을까 우려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닌 보이지 않는 마음(invisible heart), 즉 따뜻한 마음이 경제원칙으로 자리 잡았으면 한다.

대기업의 각종 사업영역 확대는 사회의 다양성을 훼손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과연 1등 기업만이 좋을까? 시장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상황에서 1등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 세계 휴대폰 점유율 40%, 자국 수출의 20%를 차지했던 핀란드의 노키아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 기업이 많은 인재를 빨아들이다 보니 주위에 창조적인 기업이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은 노키아의 쇠락이 역설적으로 창업 열풍을 불어오고 창의적인 인재가 새로운 창업 생태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대기업의 쌀 가공·유통망 확대로 원료곡에 대한 조달 가격 인하로 이어져 농업인 소득 하락은 물론, 저가 정책을 이용한 대량 판촉으로 인해 지자체에서 개발한 쌀 브랜드 파워도 희석시킬 수 있다. 쌀 가격 하락이 소비자에게 혜택이 돌아간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쌀 소비량이 매년 줄고 있고 밥 한 공기 원가가 몇 백 원 정도에 불과한 상황에서 얼마큼 많은 혜택이 돌아갈지는 미지수다.

쌀농사를 하는 농업인은 풍년이 드나 흉년이 드나 늘 시름을 안고 있다. 그래서 쌀농사만 하는 전업농이 줄어들고 있다. 물가는 올라도 쌀값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보니 대량으로 짓지 않으면 생계가 어렵다. 이렇게 생산한 쌀도 유통이라는 벽에 막혀 갑(유통회사)이 요구하는 가격에 내놓을 수밖에 실정이다.

쌀도 ‘도서정가제’처럼 RPC 출하가격에서 10% 이상은 인하할 수 없도록 해 생산, 유통 질서를 확립하고, 작은 서점도 대형 서점에 대응해 살아남는 생태계가 만들어졌듯이 쌀도 공산품처럼 취급받지 않고 생명산업이라는 부가적인 가치를 더해서 제값으로 유통되는 생태계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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