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마시면 더 맛있는 와인스토리㉕ - 잊을 수 없는 와인(2)

살다보면 한 번쯤은 무리를 해서라도 분에 넘치는 호사를 누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결혼식에서는 수백만원짜리 비싼 드레스도 입어보게 되고, 고급 웨딩카도 타보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황실에서나 사용하던 용무늬 장식의 비녀인 용잠을 혼례나 여자 아이의 성인식인 계례 때만은 민가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했다니, 인생의 특별한 날에 한번쯤 부려보는 사치는 현대인들만의 욕망은 아닌 모양이다.

와인애호가 또한 이런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귀한 와인을 마시는 순간의 감동은 마약과도 같아서 자꾸 다시 만나고 싶은 간절한 욕망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필자 역시 지난 십여 년간 그 욕망을 쫓아다닌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감동도 있었고 실망도 있었지만 그 중에서 특히 감동적이었던 와인으로 샤또 라피트 로쉴드(Chateau Lafite Rothschild)를 꼽을 만하다.
라피트는 프랑스 보르도지역 최고의 와인산지인 뽀이약(Pauillac)마을의 1등급 그랑크뤼 와인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중국 애호가들의 싹쓸이 쇼핑 탓에 가격이 수백만원대로 올라버려서 이제는 큰맘 먹고도 사기 어려운 와인이 되어버렸지만, 십여 년 전만해도 운이 좋으면 30~40만원에 구할 수 있는 와인이었다.  물론 그 가격 또한 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와인 좋아하는 미친놈들을 5~6명만 모으면 한 병쯤은 무리해서 딸 수 있었으니, 애호가 입장에서 보자면 지금 보다는 십여 년 전이 훨씬 행복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라피트는 그 명성에 걸맞게 그야말로 끝내주는 향기를 뿜어냈었고, 그 후로도 나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었다.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정열적으로, 그렇지만 언제나 절제된 음색으로 노래하는 최고의 가수 같았다.

“처음 입속에 들어왔을 때 향수를 삼킨 줄 알았어.”
함께 마셨던 친구는 라피트를 그렇게 표현했었다.  그런 매력 때문이었을까.  나는 태어난 지 6개월 된 아들 녀석에게도 이 와인을 젓가락으로 찍어 먹였었다.  재미삼아 자꾸 주다가 양이 과했던지 얼굴이 붉어져서 술을 먹인 애비는 의사한테 혼쭐이 났었지만, 웃으면서 와인을 쪽쪽 빨던 녀석의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마도 최연소 라피트 취객은 그놈일 것이다.

즐거운 해프닝뿐만 아니라 아쉬움을 달래던 기억도 있다. 늘 같이 와인을 마시던 동생이 먼 곳으로 떠난다고 했을 때에도 나는 라피트를 식탁에 올렸다. 그 녀석과 못다 마신 와인들을 한 잔에 몰아서 마시는 심정으로 천천히 한 모금을 삼켰을 때 라피트는 우리 둘에게 더없이 따뜻한 위로가 되었었다.

때로는 축하를 위해서, 때로는 위로가 필요해서 라피트를 마셨지만 결과는 모두 같았다. 그 섬세하고도 짙은 향기, 끝을 알 수 없는 루비색의 라피트가 무대 위에서 노래하기 시작하면 모두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끝에는 언제나 따뜻한 감동과 행복이 밀려왔다.

▲ 김홍철 가평와인스쿨학과장

불현듯 중국인들이 왜 이 와인을 그렇게 즐겨 찾는지 궁금해져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라피트(Lafite)라는 이름이 중국어로 樂喜(즐거울 락, 기쁠 희)와 비슷한 발음이라는 것이다. 중국에서도 라피트는 행복을 기원하는 와인이 된 것이다.

행복한 순간에 마셔서 맛있는 와인이 되기도 하고, 맛있는 와인을 마셔서 행복한 순간이 되기도 한다.  다만 와인이 맛있게 느껴지는 순간에는 행복을 만끽할 줄 알아야 한다.  그 때는 파우스트의 대사처럼 이렇게 외쳐보자.  “멈추어라 시간이여. 너는 아름답구나.”

☞그랑크뤼(Grand Crus)는 1855년 파리엑스포를 통해 보르도지역 와인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선정되었던 고급포도원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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