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누군가 그랬다. ‘만나는 것은 우연이지만, 맺어지는 것은 필연’이라고. 불가에서는 모든 만물은 크고 작은 인연을 가지고 생멸(生滅)한다고 했다. 이른바 ‘인연설’이다. 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아들과 딸이고 누군가의 남편과 아내이자 누군가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것처럼. 모두가 인연의 끈끈한 줄로 이어져 있다.

내가 십수년 째 살고 있는 흑석동의 허름한 구옥의 거실과 옥상에는 나와 크고 작은 인연을 맺고 한 식구로 살고 있는 화초와 나무들이 있다. 작은 몸짓으로 소리없이 순한 양처럼 살아가는 작은 생명들이지만, 내게 생명의 윤리와 가치를 일깨워 주고 있는 더할 수 없이 소중한 존재들이다. 힘이 들어도 이사 다닐 적마다 먼저 챙기는 이유다.

그중에서도 올해로 서른살 먹은 치자(梔子)나무가 우리집 식구들에겐 유독 각별하다. 이 녀석이 나와 만난 건 이십칠년 전이다. 집에 올 때 3~4년은 됐음직해 보였으니 나이 서른이 맞다.
동대문구 용두동의 한 빌라로 막 이사 했을 때인데, 때맞춰 시골에서 올라오신 어머니께서 인근 경동시장에서 3천원 주고 샀노라며 오두마니 흰 꽃송이 하나 가지끝에 피워올린 못난 놈을 들고 오셨다. 유난히 장미꽃을 좋아하셨던 어머니 눈에 티없이 맑게 피어 있는 흰치자꽃이 꽂혔음이다.

처음엔 대충대충 물이나 주고 키웠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녀석은 해를 거듭할수록 새 움을 틔워가며 무성한 가지를 만들고, 남 주기 아까운 진한 향기를 뿜어댔다. 그러길 17년, 그뒤 흑석동으로 옮겨 와 두번 분갈이를 해줬는데, 사단은 서너해 전 주인인 나의 나태함에서 비롯됐다. 내둥 갈무리를 잘해 옥탑창고에서 겨울을 나게 했는데, 그해 따라 옥상에 그대로 방치해 겨우내 바싹 말라죽어가게 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말라비틀어진 가지들을 톱으로 잘라냈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이 와 라일락의 꽃망울이 푸릇푸릇 불거질 때였다. 하루는 옥상에 올라갔던 아내가 나를 소리쳐 불렀다. 한달음에 올라가 보니, 이런 기적같은 일이… 녀석이 살아 밑둥에 파란 새싹이 돋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 두손을 모으고 “고맙습니다.”를 연발했다. 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던 녀석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예전처럼 무성하게 가지며 잎을 피워올리며 지금 한창 소담스런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뿐이랴. 지금 옥상엔 어디서 씨앗이 날아왔는지 모르는 달개비꽃이며 까마중, 깨풀, 그리고 엉겅퀴, 방동사니들이 피어나 작은 몸짓으로 바람에 너울대고 있다. 그 또한 작은 인연들이려니 생각하면,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싶다. 인연은 그렇게도 오고 또 그렇게 간다.

※알림-지난 2009년부터 7년 3개월간 연재되어온 <세상만사>는 이번호로 끝을 맺습니다. 그동안 따뜻한 성원을 보내주신 애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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