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어머니의 신혼(新婚)은 6·25전쟁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용케도 일제(日帝)의 정신대 공출 마수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고, 꽃다운 스물 한 살의 나이에 세살 위 동네 미남총각과 결혼했으나, 신혼의 단꿈에서 깨기도 전에 난리가 터졌다.

신랑은 이내 살아 돌아올 기약없는 군대에 입대해 총알이 비오듯 하는 전쟁터로 나갔다. 군입대 전 동네사람들은 커다란 태극기 바탕에 나름의 소망들을 격문처럼 붓글씨로 쓴 다음 고이 접어 출정을 앞둔 신랑의 품속에 저며 넣어주었다. ‘살아서 돌아오라~!’

전쟁은 한창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전쟁 상황은 동네 구장을 통해 ‘~카더라’식의 뜬소문 같은 말만 간간 들려올 뿐이었다. 그런 틈새로 ‘미군 껌둥이가 동네마다 다니면서 처녀들을 잡아먹는다더라~’하는 괴담이 흘러다녀 할아버지는 새며느리를 사랑채에 쌓아놓은 볏가마니 속에 숨겨놓기도 했다. 그것은 유엔군이 진격하면서 마을마다 적색분자인 ‘빨갱이’ 색출을 위해 가택수색 하던 것을 두고 부풀어오른 공포괴담이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인민군 치하에서 붉은 완장을 차고 부역(附逆)했던 아무개네 삼촌, 아무개네 아버지 등 마을 장정 예닐곱명이 신새벽에 국군에 의해 색출돼 줄줄이 포박된 채로 끌려가 마을 앞 솔숲등성이에서 처형당했다. 그래서 마을에는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내는 집들이 여느 마을사람들과는 거리를 둔 마을 안의 섬처럼 생겨났다.

그러는 사이 어머니는 첫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백일(百日). 하루는 어머니가 꽃단장을 하고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는 갓난 아들을 들쳐업고 집을 나섰다. 걸어서 십리길인 온양가는 들목의 둔포라는 장터에 있는 사진관에 가기 위해서였다. 전쟁터에 있는 사랑하는 남편에게, “이 아이가 당신 아들이오.”하고 아들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아들 사진 촬영은 첫돌 때에도 이어졌다.
백일이 되어 오동통하니 뽀얗게 살 오른 벌거벗은 첫 아들을 끌어안고 찍은 새색시적 어머니의 청초한 모습에서는 그리움이 가득 묻어났다. 밤송이 같은 상고머리, 색동저고리에 바지를 입혀 의자 위에 서 있게 하고 찍은 돌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여보, 우리 아들이 이렇게 커서 아장아장 걷는다오.” 하고 대견스럽다는 투로 말하는 어머니의 젊은 음성이 들리는 듯 하다.

그뒤 아버지가 난리통에 군에 입대한 지 5년 만에 제대해 귀향하면서 어머니의 ‘사부곡(思夫曲)’은 막을 내린다.
이제 25일로 6·25 65주기를 맞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얼마나 많은 전쟁의 초상들이 아직도 새겨져 있을까. 전쟁의 쓰라린 초상으로, 기억의 조각들로 남은 맏아들의 백일·돌사진을 쓰다듬으며 치매를 앓는 늙으신 어머니는, 지금도 저 세상에 먼저 가신 아버지를 그리워 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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