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열모 미국주재 대기자

▲ 동열모 미국주재 대기자

"안중근 의사의
불타는 애국심과 정의감
동양평화라는 원대한 이상,
그 장한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감동적인 편지,
호국 영령의 달 6월 맞아
안 의사의 위대한 호국정신
더욱 우러러 보인다."

1909년 10월26일 아침 9시30분에 만주(滿州)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갑자기 세 발의 총소리와 함께 “대한제국 만세”라고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로 그 순간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열차에서 내린 귀빈이 피투성이 돼 쓰러져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이날 아침에 총을 쏘고 만세 부른 사람은 우리의 영웅 안중근(安重根) 의사였고, 그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바로 대한제국을 삼키려는 일본 제국주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 의사는 여순(旅順) 형무소에 수감돼 1심 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5개월 뒤인 1910년 3월26일 사형을 집행하기로 예정됐다. 이 재판에서 변호인이 “안중근 의사는 군인 신분이기 때문에 국제법에 따라 군사재판을 받아야 하며, 1심에 불복하고 상소하겠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대해 안중근 의사는 “자신은 이미 나라에 바친 몸이기 때문에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당당히 죽음을 택했으니 상소를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도 안중근 의사는 어머니를 두고 먼저 간다는 불효에 마음이 몹시 아팠다. 사형을 앞두고 이렇게 불효를 안타까워하는 사형수 아들에게 어머니 조 마리아(본명 조성녀)는 다음과 같은 애절한 편지를 보냈다.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결행한 일이니 딴 마음을 먹지 말고 죽으라. 좋은 일 하고 받는 형벌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이 편지는 아마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내 수의를 보내니 이 수의를 입고 먼저 가거라. 어미는 너를 현세에서 재회하기를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서 천부의 선량한 아들이 되어 그곳에서 만나자”

이 편지에는 가슴을 저리게 하는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이 담겨져 있다. 나라와 민족을 염원하는 뜨거운 충성심이 압축됐기에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진실로 장한 어머니의 장한 아들이다.
안중근 의사는 나라가 일본의 침략을 받게 되자 1907년에 만주를 거쳐 연해주에 건너가 그곳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면서 뜻을 같이하는 11명의 동지들 규합해 약지(藥指; 넷째 손가락)을 절단한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고 항일전에 몸을 바친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2일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910년의 3월26일에 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했다. 겨우 31살의 짧은 생애였지만 그는 누구보다 굵고도 장한 삶을 살았다.
안중근 의사는 항일전에 몸 바친 군인인 동시에 미래를 통찰하는 선각자이며 온유한 학자였다. 수감생활 5개월 동안에 평소에 주장하던 동양평화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안중근 의사의 논리가 일본인 간수들까지도 공감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형무소 내에서 그의 뛰어난 붓글씨에 단지(斷指) 손도장이 찍힌 휘호를 얻으려는 경쟁도 일어났다.   
안중근 의사의 불타는 애국심과 정의감, 그리고 동양평화라는 원대한 이상이 널리 알려지지 못하다가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주석을 만난 자리에서 좋은 결실을 보게 됐다. 중국은 하얼빈역의 옛 거사 자리에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을 웅장하게 건립해 현재 이 지방의 명소가 됐다고 한다.  
호국 영령의 달 6월을 맞아 안중근 의사의 위대한 호국정신이 더욱 우러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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