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民心)에서 볼 수 있는 도덕적 판단의 양식-

사람들은 강압적으로
누군가를 밀알로 만드는 것을
부도덕한 행위로 평가한다
밀알은 어디까지나
밀알이 되고자 하는
자율적 의사를 요구한다

 

 


우리는 매 상황을 접하면서 ‘무엇이 옳은 것인가?’라는 도덕적 판단을 행하며 살아간다. 최근 국내 여론을 강타하고 있는 성완종 리스트에 관련해 전개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각기 ‘무엇이 정의인가?’라는 도덕적 판단을 행하고, 민심을 형성한다.

우리는 통상 어떤 상황을 판단할 때, 두 가지 도덕적 원칙을 인식해 의견을 정립하곤 한다. 하나는 행위의 결과에 초점을 두고 도덕성을 판단하는 결과론적 도덕 추론이고, 다른 하나는 시공간에서 절대적인 어떤 이성의 양심(이성)의 명령으로서 갖는 도덕적 규범을 작동해 판단하는 정언적 도덕 추론이다. 여기서 추론이란 어떤 사실로서의 전제들을 갖고 결론을 도출하는 사고나 사고하는 방식을 말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운전기사라고 해보자. 주행 중에 브레이크가 고장났다. 계속 달리면 앞에 5명이 자동차에 치여 죽는다. 그런데 핸들을 옆으로 돌리면 한 사람만 죽는 상황이라고 하자. 이때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필자의 경험적 사실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핸들을 돌려 한 사람만 죽이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라고 생각했다. 이유를 묻자 “한사람이 희생해 다섯 사람의 생명이 보존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이러한 판단은 행위로부터 가져오는 결과론적 도덕 추론의 산물이다. 소위 벤담이 말하는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 다수가 갖는 효용으로서의 행복 증가’가 발생하면 도덕적으로 옳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공리주의적 사고다.

미국에서 발생한 뉴욕의 쌍둥이 빌딩을 붕괴시킨 9.11테러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이때 자살테러로 이용된 납치 비행기 한 대를 들판에 추락시킨 사람들이 있었다. 도심에 비행기를 충돌시키려는 자살테러를 막아낸 그들을 많은 사람들이 영웅으로 칭송했다.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가정해보자. 어떤 의사가 있다. 만약 그 의사가 건강한 사람의 장기를 이식해 건강하지 않은 다섯 사람을 살려냈다고 하자. 이러한 경우 한 사람의 희생으로 다섯 사람을 살려낸 경우다. 이때 우리는 의사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옳은 것으로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인간에게는 그 누구도 그 무엇에 의해서도 어떤 상황에 의해서도 침범될 수 없는 인간 존엄과 권리를 갖고 있다는 생각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행위가 가져오는 이익이 극대화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념은 문명사적으로 오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소위 희생양이다. 최근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완종 리스트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에서 혹시 누군가 한 사람의 희생으로 부정부패 없는 사회가 만들어진다면, 그가 희생돼도 옳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가령 한사람의 희생으로 불특정 다수인 국민이 바라는 부정부패 없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밀알이 됐다는 결과론적 사고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행위를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다른 동물들과 두드러진 판단의 차이점이다. 성완종 사건을 두고 나타나는 민심은 이를 보여준다.

일상에서 흔히 밀알이라는 말들을 사용하고 한다. 가령 ‘한 알의 밀알이 죽어 백 개의 싹들 만들어낸다’는 말이다. 하나의 희생으로 여러 개의 싹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희생양과 형식은 같다. 그런데 내용적으론 많이 다르다. 사람들은 강압적으로 누군가를 밀알로 만드는 것을 부도덕한 행위로 평가한다. 밀알은 어디까지나 밀알이 되고자 하는 자율적 의사에 의한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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