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정승 유관(柳寬, 1346~1433)은 황희·허조와 함께 세종조의 청백한 정승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흥인문(지금의 동대문) 밖에 초가집 두어칸을 세웠는데, 비가 오면 우산을 가져야 비가 새는 것을 가릴 수 있었다. 어느 비오는 날 유정승이 부인에게 -우산이 없는 집에서는 어떻게 한다오?- 하였다.
뒤에 유관의 아들 판서 계문이 집을 자못 높다랗게 짓고 살았다. 유관이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놀라 바로 고치게 하였다.

훗날 우리 아버님이 공(유관)의 옛집에 사시면서 짚으로 지붕을 하시었다. 손(孫)들이 이것을 보고 웃으면서 너무 소박하고 누추하다고 하였다. 그러자 아버님이 -이것도 우산에 비하면 사치스럽지 아니한가?- 하였다.’

이 이야기는 조선조 때 이수광(李晬光, 1563~1628)이 지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청백리 유관의 청빈한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기록이지만, 지금식의 생각으로는 ‘참 딱하기 그지 없는 꽉 막힌 인사’에 다름 아니다. 당대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세가 있는 정승이니 여봐란 듯이 고래등 같은 기와집 한 채 가질 수 있을 법도 한데 그렇질 못했으니 말이다. 하기사 오죽해서랴 세종임금이 그 딱한 처지를 알고 주인 몰래 담장을 쳐 주었을까 싶다. 요새처럼 저택 하나 나라에서 찍어 주고 전세나 월세로 살라고 했으면 살았을까…? 그조차도 ‘NO!’했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하긴 문간방 세살이는 몰라도 전세라는 게 있지도 않았던 시절이니 초가누옥일 망정 나름으로 내집에서의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즐겼을 것 같다.

주거형태의 하나로 전 세계 그 어느 나라에도 없는 전세 제도가 생겨난 건 6·25해방 이후 주택난 해소를 위해서 였다. 통계청의 집계(2012년)에 따르면, 전국의 가구수는 1,806만호인데 주택수는 1855만호로 주택 보급율이 100%를 넘는데도 불구하고 1가구 2주택 등의 주택보유로 자가주거비율이 전체가구의 절반이 조금 넘는 53.75%인데 반해 전세비율은 21.79%에 달한다.

그런데다가 최근 전세가가 대책없이 크게 뛰어올라 집 매매가의 70~80%에 육박하는데, 실제 서울에서 국민주택규모인 85㎡(25.7평)의 경우 전세가가 약2억8000만원에 이르니 곳곳에서 ‘깡통전세’란 속어가 날아다닌다. 즉, 집주인이 은행대출금 이자를 계속 연체해 집이 경매에 넘어가 버렸기 때문에 전세로 들어간 세입자가 전세보증금을 몽땅 날리고 거지처럼 깡통을 찰 처지에 있대서 ‘깡통전세’란 말이 생겨난 것이라니… 정말 ‘아, 옛날이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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