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고 마시면 더 맛있는 와인스토리⑨

전장의 병사들에게
사기진작·생존 위한 보급품
농부들에겐 식량이자 재산

▲ 샤또마고 전경

현대사회에서도 술은 화합의 상징인 동시에 종종 분란의 씨앗, 싸움의 기폭제가 되곤 한다. 그럼 과거에는 어땠을까? 와인애호가에게 있어서 ‘와인’과 ‘전쟁’이라는 두 단어를 연결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와인을 둘러싼 싸움들이 많았다. 유명한 것으로는 1337~1453년까지 영국과 프랑스 간에 벌어진 백년전쟁을 들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영국과 프랑스 영주들의 작위다툼으로 보이지만 그 핵심은 브르따뉴지방의 양모나 아끼뗀지방(지금의 보르도지역)의 와인생산지를 둘러싼 이권 쟁탈전이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1152년 아끼뗀의 공녀 엘레오노르가 영국의 헨리2세와 결혼하면서 그녀가 소유했던 가스꼬뉴지방이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 백년전쟁의 예고편이다. 하루아침에 최고의 와인생산지를 빼앗긴 프랑스는 영국과 길고 긴 전쟁에 돌입하게 되는데, 100년이 넘도록 계속된 전쟁 끝에 프랑스는 잔 다르크의 등장에 힘입어 승리했고, 그 덕분에 현재 세계 최고의 와인생산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됐다.

와인을 둘러싼 전쟁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 속에 등장하는 와인이야기는 더욱 더 많다. 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의 키루스왕은 병사들의 세균감염과 질병을 막기 위해 와인을 마실 것을 명령했고, 그 후 카이사르도, 나폴레옹도 모두 전쟁에 임할 때면 병사들에게 와인을 마시게 했다. 이런 이유로 와인은 군대의 행렬을 따라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가게 됐고, 군대가 머물렀던 곳마다 포도나무가 심겨졌던 것이 오늘날 세계의 와인생산지를 형성하는 시발점이 됐다.

전장의 병사들에게 와인이 사기진작과 생존을 위한 보급품이었다면, 전쟁을 겪었던 농부들에게 와인은 숨겨야할 식량이자 재산이었고, 포도밭은 그들에게 생존의 희망이었다. 때문에 2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만들어진 미로 같은 지하저장고들은 오늘날 훌륭한 유산인 동시에 아픈 과거의 산물인 것이다. 악명 높았던 나치수용소 안에서도 포로들은 한모금의 와인을 위한 축제를 계획했는데, 이를 알리는 전단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적혀있다.

우리는 태양과 포도밭 사이로 부는 미풍에 대해 노래하고자 한다. 우리는 철조망과 이 수용소 벽 뒤에서는 볼 수 없는 것에 대해, 그리고 이곳 실레지아 평원의 거칠고 척박한 땅에서는 자랄 수 없는 것에 대해 노래하고자 한다. … 중략 … 우리는 우리의 의식이 아름답고 풍부하게 자라고 익어서 수확된 포도와 같은 것이 되기를 희망한다.

이와 같이 전쟁의 불씨가 됐던 와인, 전쟁 속에서 희망을 가지게 했던 와인이 있었으니 이제는 전쟁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와인을 만나보자.
200년 전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패한 후 패전국 프랑스의 처우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다. 이 회의에서 프랑스의 외무장관 뻬리고는 훌륭한 음식과 최고급와인 샤또 오브리옹(Ch. Haut-Brion)으로 승전국 대표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마음을 닫았던 각국의 대표들도 2년간에 걸쳐 거듭되는 미식과 명주의 향연에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됐고, 이 분위기를 타고 순조롭게 이뤄진 대화는 프랑스가 최소한의 배상만 하는 선에서 편안하게 마무리됐다. 또한 2차대전에 패전한 독일이 프랑스에 공식적인 사과를 한 곳이 프랑스의 엘리제궁이나 국회의사당이 아닌 프랑스 최고의 와이너리인 마고성(Ch. Margaux)이었다는 점은 눈여겨 볼만한 일이다. 그 곳에서 프랑스인의 명예와 긍지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과거의 잘못에 대한 최선의 사과가 아니었을까.

▲ 김홍철 가평와인스쿨학과장

필자의 집에도 작은 전쟁이 끊이질 않는다. 포도철인 가을부터 연말까지 각종 행사가 많은 기간이면 귀가가 늦어지기 일쑤기 때문이다. 핑계라면 직업상 와인을 만드느라 늦거나, 와인을 마시느라 늦는 것인데, 화난 아내를 달래는 방법은 두 경우 모두 같다. 맛있는 와인 한 병과 직접 요리한 음식을 한 접시를 앞에 놓고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와인 때문에 속상해 죽겠다는 아내의 볼멘소리도 잠시 후면 가라앉을 것이다. 아내가 원하는 것은 얼굴 마주하고 이야기할 사람이지 “뭔지 모르지만 내가 잘못했다.”는 말을 사과랍시고 하는 남편은 아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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