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다문화특별기획 - 해피투게더

■ 日本 현지취재-자이니치(在日)로 살아온 ‘후지와라 영순’ 씨(도쿄 아자부주반 거주)

여행가이드로 25년… “도쿄에서 잘생긴 사람은 한국인”
반복되는 갈등 속에서도 가까워지는 한·일관계

“한-일 관계는 가깝고도 먼 사이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아요. 정권자에 따라 관계가 항상 럭비공처럼 튀죠. 하지만 점진적으로는 우호에 가까워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30대 초반이던 지난 1972년 일본인에게 시집와 지금까지 일본에서 살고 있는 후지와라 영순(72)씨의 말이다.
요즘 우리나라에 저개발국 출신의 결혼이주여성들이 몰려오듯 우리나라 여성들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영순 씨는 그들 중의 하나다.
“하~ 한국인으로서의 일본생활...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죠.”
쓰기도 달기도 시기도 맵기도 했던 ‘자이니치’의 삶을 들어봤다.

주마등 같은 40년 일본생활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에서의 한국 붐은 대단했다.
일본 도심의 어딜 가나 배용준과 최지우 포스터에 겨울연가의 OST와 가수 보아의 댄스곡이 거리를 메웠다.
하지만 지금 도쿄 거리를 지나다보면 혐한(嫌韓)시위가 곳곳에서 눈에 띈다.
특히 아베정권이 들어선 이후 일본사회가 극우주의적 성향으로 급격히 기울면서 이런 현상은 심화됐다. 그러나 또한 거리곳곳에서는 혐한시위를 반대하는 친한시위도 늘어나고 있다.
영순 씨는 때로 이러한 친한 시위에 ‘일본인’으로서 참가하고 있다.
영순 씨는 한국출신이지만 국적은 일본인이다.
한국에서 온 기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40여 년 동안 일본에 살면서 겪은 여러 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고 영순 씨는 말한다.

영순 씨는 요즘도 일한다. 도쿄시내 관광가이드를 하면서 인근 교토, 오사카, 하코네유모토 등을 안내하는데 아직도 한 달에 45만 엔(약 450만원) 이상을 번다고 한다.

일본인 남편과의 사랑과 이별
영순 씨는 한국의 탐 항공, 롯데관광이나 일본 현지 여행사들로부터 오더를 받고 관광안내에 나선다. 한때는 도쿄 신주쿠 역에서 하코네유모토 관광 한국인 통역사로 7년간 일하기도 했다.
왜 이일을 시작했느냐는 질문에는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1970 초, 영순 씨는 미쓰이(三井) 상사라는 세계적 기업의 한국출장소에서 일했다.
거기서 일본인 관리자로 일하던 전 남편 후지와라 모(某)씨와 사랑에 빠졌고 1972년에 일본으로 돌아가는 남편을 따라와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혼 9년차에 케냐에 파견 나갔다 3년 만에 돌아온 남편은 또 다른 여성을 만나고 있었다. “그냥 쿨~하게 보내줬죠.”
영순 씨는 두 아들과 딸 한 명도 키울 자신이 없어 남편을 따라 보냈다.
남편의 불륜과 이혼으로 혼자가 된 영순 씨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재혼도 하지 않은 채 ‘일본인’ 자식들이 있는 일본에서 살아왔다. 이혼 초기에는 아직 한국인들의 해외관광이 흔치 않을 때라 한국인이 운영하는 바에서 서빙과 조리를 하며 생활했다고 한다.

“이만큼 큰 한국, 자랑스럽다”
지금도 그 나이의 할머니치고는 고운 얼굴의 영순 씨는 “젊은 시절 ‘잘~생긴 한국식 미인’이었다.”고 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술집에서 일하다 보니 유혹도 많았다.
가게를 인수해 바를 운영해 볼까도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제가 좀 겁이 많아요. 제가 일하던 아카사카는 밤이 되면 속칭 ‘야캉 거리’라고 하는데 야쿠자(やくざ)와 한국을 말하는 캉코쿠(かんこく)를 합친 말이죠. 깡패들과 한국인 호스테스들이 넘쳐나는 거리라는 뜻이죠. 한마디로 거칠고 끈적거리는 거리였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고심하던 영순 씨에게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일본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이 늘면서 관광가이드로서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 이후 줄 곧 이일을 해왔던 것이다.

“시대별로 한국인관광객들을 살펴보면 재미있어요. 80년대는 어리벙벙하고 촌스럽고 우물쭈물했죠. 여성은 안 그런데 남자들은 일본인보다 훨씬 작아보였고요. 그런데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한국인들이 당당해지고 체격도 일본인보다 커졌어요. 2000년대가 넘어서면서는 한국인과 한국문화에 열광하는 일본인 매니아들이 생겨날 정도로 문화적으로 일본을 앞서나가기 시작했어요. 지금 거리에서 보는 미남미녀들은 다 한국인이랍니다.”
한마디로 이만큼 커 온 대한민국이, 당당해 진 한국인들이 자랑스럽다고 한다.

한·일 모두가 싫었던 적도…
하지만 그녀가 일본에 처음 왔을 때는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 남북관계는 언제라도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긴장이 흘렀고 남한도 북한도 최 빈국가에 가까웠다. 한국은 일본기술과 부품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만드는 저 개발국가였으며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도 파칭코 사채업 등 손가락질 받는 일이 아니면 자리 잡기가 힘들었다.

“일본인들은 대체로 청결하고 친절하지만 그 속내는 차가운 구석이 있어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분명한건 일본은 한국을 한참 아래의 하수, 한 때 지배했던 열등한 나라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영순 씨는 일본국적을 취득하고 나서도 온갖 심적인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한국에 와서 친척과 동창을 만나거나 옛 동료를 만나면 ‘어떻게 일본 놈에게 시집갈 수 있냐’는 투였죠.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깊은 적개심은 이해하지만 견딜 수 없었어요.”
한국과 일본에 운명의 교집합이 걸친 영순 씨는 모국 한국도 싫고 일본도 싫은 묘한 아이러니 속에서 10여년을 보냈다고 한다.

일 욕심은 끝이 없어
“아이고 한국은 왜 그렇게 큰 일이 많이 터지는지 모르겠어요. 올해만 해도 세월호 참사에 대형화재에 환풍구 사고까지... 너무나 시끄러운 일들이 많이 생겨요. 오랜 세월 일본인으로 살다보니 떠들썩한 한국이 좀 낯설게 느껴져요.”
그러나 영순 씨의 입맛은 아직도 한국식이다. 김치와 된장(일본의 ‘미소’와는 다른 진한 한국재래식 된장)없이는 영 입맛이 나지 않는단다.
“된장냄새만 해도 처음에는 이웃들이 대놓고 이야기는 안해도 인상을 찌푸리며 싫어했는데 지금은 제가 한국에 다녀온다면 김이며 고추장 한국식 된장을 구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만큼 일본인들 속에 한국문화가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거죠.”

그는 한일간의 역사에서부터 야구선수 장훈, 세계적 기업가인 손정의 씨등 일본에서 성공한 한국인들과 이와는 반대로 일본에서 온갖 추태와 스캔들로 망신을 당한 모 가수며 일본에서 빅히트한 한국연예인들까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박학다식과 풍부한 상식을 이야기했다.
영순 씨는 “사실 할머니가 가이드하니까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젊은 관광객들도 많아요. 그래서 요즘은 중년이상 노년들 가이드를 많이 하고 있어요.”라며 “그래도 욕심은 몇 년 더 하고 싶어요. 언젠가 제 가이드 인생을 책으로 내고 싶은데 그때도 신문에 내 주 실거죠?”라며 악수를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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