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어렸을 적, 사춘기 시골소년에게 어머니는 ‘창피함’ 자체였다. 곱디고운 스물 둘 꽃새댁의 모습은 세월에 부대끼면서 시나브로 촌아낙으로 변해갔다. 젊었을 적, 어쩌다 아버지께서 건네주시는 ‘동동구리무’(방물장수가 가지고 다니며 팔던 콜드크림류 화장품)나 ‘박가분(朴哥粉)’이 있어도 간혹 읍내장 나들이나 자식들 운동회, 원족(遠足, 소풍) 갈 때를 빼고는 딱히 바를 일이 없고 보니 그 화장품들은 낯선 이방인의 모습으로 장롱의 경대 앞에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무심하게 놓여 있었다.

평생을 입술연지(립스틱) 한번 발라본 일 없이 오직 집안 대주(大主)인 아버지와 오남매 자식들만 바라보며 살아온 어머니가 철 없던 어린 시절엔 왜 그리도 창피하게 생각됐었는지… 원족을 가는 날에는 꼭두새벽부터 서둘러 뽀얀 흰모시적삼으로 곱게 단장한 할머니를 모시고는 점심밥이며 한껏 솜씨를 낸 잔치음식 같은 갖은 반찬이 담긴 찬합, 그리고 과일이며 음료를 바리바리 보따리에 싸서 머리에 이고 다른 한손에 들고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 채 잰 걸음으로 아이들 행렬 뒤를 따르던 한복차림의 낯선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아들이 장성해 서울로 고등학교·대학진학을 하고 사회인이 됐을 때도, 결혼을 해 일가를 이루고 살 때도 그 어머니의 보따리는 가녀린 어머니의 품에서 떠나질 않았다. 서울에서 하숙과 자취생활을 번갈아 하던 아들이 어쩌다 주말에 집에 다녀갈 때면 어머니는 하시던 일 멈추고 옷가지며 먹을 것을 보따리에 챙겨들고 이내 읍내 기차역까지 따라 나오셨다. 그런 어머니의 행색이 행여 누가 볼세라 부끄러워 극구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결혼 후에도 어머니는 쌀이며 철따라 나는 푸성귀, 집앞 은행나무에서 털어낸 은행들을 보따리에 싸서 이고는 버스타고 기차타고 마을버스 갈아타시고는 후여후여 아들집으로 올라오셨다. 돈 없어 못사먹는 것 아니고, 내가 기른 것 내 새끼들에게 먹이고 싶은 마음, 그런 새끼들 한번 더 보고싶은 애잔한 마음 뿐일 터였다. 그 어머니가 이젠 치매로 요양병원에 계신다. 이따금 아들이 찾아뵈면 “누구시우?” 하시니 가슴이 메인다.

최근 부산에서 거리를 헤매던 한 치매할머니의 보따리 얘기가 온 나라 안을 짠하게 울렸다. 기억을 잃고 거리를 헤매던 할머니가 오직 한 가닥의 기억과 함께 붙안고 있는 보따리 두 개, 출산한 딸에게 먹일 미역국과 나물반찬, 흰밥과 이불보따리였다. 경찰의 수소문 끝에 한 산부인과 병원에서 출산한 딸을 보자 자신의 주소며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던 할머니가 보따리를 풀어놓으며 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서 무라(먹어라).” 아, 그런 어머니가 나에게도 계신다는 건 얼마나 큰 복인가. 그런데, 그 어머니의 보따리를 이젠 더이상 대할 수 없다는 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게 가슴을 친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