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독일에서 본 역 다문화

간호사 광부로 시작한 독일 속의 한국인들
억척스런 일생 보내며 대부분 성공 정착

▲ 신수경 리블링 대표(소품 업체) 독일 20년 거주
#나는 남편의 직장관계로 독일 북부의 ‘쾰른’에서 4년을 살았고 남부 ‘칼스루에’에서 16년을 살았다.
그런데 쾰른과 칼스루에에서 보는 한국출신 이주자들의 생활은 사뭇 달랐다.
탄광이 있는 쾰른에서는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가 결혼해 현지에 정착하는 사례가 많았고 남부 도시에서 일하던 간호사들은 현지인 -특히 의사-와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들의 초기 생활은 삶의 질에서 그 차이가 많이 났다.
쾰른에서 이웃해 살던 김 여사님은 1973년 간호사로 일하러 와 1977년 한국인 광부와 결혼해 아직도 독일에서 살고 있다. 지금 70대 중반인 이 여사님은 힘들었던 이주 초기 간호사생활을 회고하곤 했다. 우리나라와 달리 보호자나 간병인의 간병이 법적으로 금지돼 있는 독일에서는 간호사가 이 모든 역할까지 수행해야 했다고 한다.
특히 종합병원의 경우 아무래도 험한 정신병동이나 말기암 병동 등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힘들게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더 힘들게’ 일하고 돌아온 남편이 있고 보살펴야 할 아이들도 있다. 고된 생활 속에서도 한국에서 6개월 월급이 넘는 급여를 기쁜 마음으로 고향에도 보내고 악착같이 모으며 아이들을 양육했다고 한다.
칼스루에에서 만난 민 여사님 역시 똑같이 어려운 간호사생활을 했다.
남편을 사별하고 독일에 온 민 여사님은 현지 독일인 의사와 결혼하면서 경제적인 윤택을 얻었다. 한국여성 특유의 순종적이고 가정적인 민 여사는 쓸고 닦고 정리하고 하루 종일 움직이며 똑순이 같은 주부역할을 해냈다. 독일인 남편은 그런 민 여사를 사랑하면서 행복한 가정생활을 꾸려나갔다.
이 여사님과 민 여사님 같은 한국출신 간호사들은 독일사회 곳곳에서 열심히 인생을 살아왔다. 초기의 정착생활은 차이가 많이 났지만 지금은 다들 아이들을 잘 키워 대부분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자리잡고 있다.
#내가 만나 본 독일인들은 대부분 한국인들에 대해 긍적적인 평을 했다.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가족에 헌신적’이라는 것이다.
아직 독일에는 못 미치지만 우리 대한민국도 이제는 선진국의 초입에 올라서 있다.
이제는 독일인들이 한국 스마트 폰을 쓰고 한류스타의 콘서트를 찾고 있다.
독일인들에게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준 것은 다름 아닌 초기 노동이주자들의 치열한 삶이었다.
그렇게 3~40여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들은 촌스럽고 가난해 보이는 노동자에서 보란 듯이 성공한 자녀들을 키워낸 장한 부모님들로 성장했다.
존경의 마음과 함께 수많은 이 여사님 민 여사님들에게 그리움의 문안을 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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