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 스타연구원이 스타기관 만든다

②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화훼과 정향영 연구관

남보다 한 박자 빠른 욕심이 바로 ‘열정’
최선을 다한 정직한 선배로 기억되고파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최초의 여성 과장,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생물부 최초의 여성 부장 등등 ‘여성최초’라는 수식어보다 연구자로서 본연의 일을 더 사랑한다는 화훼과 정향영 연구관(57·사진). ‘여성’이라는 꼬리표가 부끄럽지 않게 더 열심히, 그리고 냉정하게 자신을 채찍질해왔고, 이제 2년여의 공직을 남겨둔 정 연구관으로부터 33년 공직생활의 희로애락을 들어본다.

여성연구사로서 산다는 것
“대학 4학년 때 농촌진흥청 농업연구사 시험에 합격해 대관령 고령지농업시험장으로 1980년 4월 첫 발령을 받았어요. 오지긴 했지만 대관령의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새로움을 탐구하는 연구직에 매료돼 그대로 눌러앉은 것이 지금에 이르게 됐죠.”
초기에는 홍일점이라고 매사에 많은 관심을 끌었지만, 그만큼 부담과 고충도 컸다고 그녀는 회상한다.
“고령지시험장에서 7년, 경기도농업기술원에서 5년을 근무하고 연구관으로 승진하면서 비로소 꿈에도 그리던 원예연구소 화훼과에 농업연구관으로 발령받았어요. 서른여섯 젊은 나이에 관엽류연구실장, 숙근류연구실장을 하면서 정말 열심히 했어요.”
일을 추진하면서 가능성을 재보기보다 먼저 부딪쳐보는 스타일이라 그녀는 남들보다 한 박자 더 빨랐다. 남들은 그녀를 욕심쟁이라고 했지만, 그녀 자신은 일에 대한 ‘열정’이라고 강조한다.
한창 카네이션 연구에 집중하고 있을 때 화훼과장으로 발령이 났다.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보다 ‘이공분야 첫 여성과장’이라는 타이틀이 어깨를 무겁게 했단다.
“2000년 10월부터 딱 3년. 최초의 여성 관리자로서 여성관리자에 대한 편견을 깨야할 사명감을 느꼈어요.”
화훼과장으로 일하는 동안 화훼작물 신품종육성 기반을 확립하고 육성품종의 농가보급 체계를 구축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화훼과장 시절은 힘도 들었지만 칭찬도 많이 받고 에너지를 마음껏 쏟아낼 수 있었던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생각해요.”
화훼과장 임기를 마무리하고 미국 상주연구관으로 가는 남편을 따라 2년간 휴직을 했다. 미국농업연구청(USDA) 화훼연구파트에서 연구도 하고, 일도 배웠다.

잠깐의 외도와 컴백
미국에서 돌아와 화훼과에 복직해 난선인장연구실장을 하면서 난사업단을 발족시키고 호접난 육종에 전념하던 중 국립농업과학원 농업생물부장으로 발령이 났다.
“농업생물부장 시절은 제 인생에서 고진감래의 시기였어요. 생소한 분야라서 때론 소화하기 어려운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평소 신념대로 최선을 다해 유용미생물, 누에, 곤충, 돌발병해충 등 농업생물부 업무를 공부했어요. 그 결과 개인적으로는 고위공무원 22명중 상반기 최우수상을 받았고, 부서는 우수상을 받았죠.”
재임 시절 농업생물부의 과제 2개가 ‘국가 과학기술 100대 과제’에 선정됐고, 최우수팀상, 우수연구원상을 받기도 했다.
다시 화훼과로 돌아온 그녀는 새로운 작목인 칼라 육종을 맡고 있다. 농진청이 육성한 품종의 농가보급에 주력했고, 보급률도 획기적으로 높였다. 구근실장으로서 나리연구단의 기능을 활성화해 산학연협력도 굳건히 했다.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아 올해 원예원 개소 60주년 행사 때 구근실이 최우수팀으로 ‘골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햇볕 났을 때 건초 말려라”
“‘햇볕이 났을 때 건초를 말려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기회가 왔을 때 최선을 다해 꼭 잡아야 한다는 말이죠. 여성으로서 역경과 시련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나를 지켜준 것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최고의 미래를 위해 준비한다’는 신념이었죠.”
하루하루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냉정한 힘과 열정이 현재의 그녀를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고 힘줘 말하는 정향영 연구관.
남은 공직 2년. 그녀는 ‘후배들에게 있는 모습 그대로, 열정을 갖고 최선을 다한 정직한 선배’로 기억되길 바란단다.

 정향영 연구관의 공직생활 최고 순간?
희(喜) - 연구관 승진시험에 합격 했을 때. 열심히 한 만큼 기쁨도!
노(怒) - FTA나리연구단이 2014년 도약에 실패했을 때. 5년 정도 지속적으로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중요한 시점이라서. 열심히 일을 추진했는데 이루지 못했을 때겠지요.
‘백합’ 대신 순우리말인 ‘나리’로 써 달라고 신문에도, 공공 회의시간에도 정말 많이 노력했는데 농림축산식품부를 비롯해 대학교수, 가까운 연구직들도 안 쓸 때 정말 화납니다.
애(哀) - 구근실의 대들보였던 후배연구사 조해룡 박사를 하늘로 떠나보냈을 때. 선배로서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과 아쉬움이 컸어요. 부모님이 세상 떠날 때 빼곤 최고로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락(樂) - 최우수연구팀상을 받아서 구근실 직원들과 유럽여행 갔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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