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학 시사평론가

▲ 유병학 시사평론가

역설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보수층의 지지를 기반으로 탄생한 현 정부가 ‘창조경제’를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란 단어 자체가 진보적 성향이 없이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보수 성향에서는 늘 기존의 것이 나올 뿐이다. 과거의 것을 계승하고 현재의 것을 수리해 가동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수는 낯선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그런데 창조는 새로움이다. 새로움은 익숙함과 대치되는 낯설음이다. 기존의 시각과 관점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다.

‘창조’는 낯설다
1930년대 일제치하 시대 이상이라는 시인이 있었다. 그는 당시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문학의 새로움에 도전한다. 12편의 오감도 시를 신문을 통해 연재했다. 그의 시는 기존의 시적 관념을 철저히 배격했다. 시라는 것은 스토리가 있고, 리듬과 형식이 있어야 한다는 관념으로부터의 탈피이다.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와 같이 어법을 탈피하여 띄어쓰기를 사용하지 않고 서술했다. 그는 오감(五感)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시를 글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으로 인지하는 ‘보는 시’를 추구했다. 도형이나 숫자를 써놓고 그것을 시라고 했다. 요즘말로 하면 흔히 문자메시지에서 사용하는 기호와 영상을 통한 표현이다. 이러한 그의 표현방식은 대단히 낯설다.
미완의 화제작으로 끝난 이상의 오감도를 오늘날에는 어떻게 생각할까? 21세기 오늘날 ‘보는 시’라는 형상적 표현양식은 낯선 것이 아니다. 물음표(?)와 느낌표(!)만으로도 하나의 시가 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문학평론가들은 그의 시를 사실주의 작품으로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시에 대한 도전은 민족의 좌절이었지만 기쁨이었고, 실패였지만 성공이었다.”라고.

‘새로움’ 받아들여야
창조는 도전과 실험에서 시작된다. 창조가 일어나는 사회는 사회구성원들이 새로움과 낯설음을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창조가 역동적으로 일어나고, 일어난 창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 구성원들이 새로움과 낯설음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정부가 할 일이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이 새로움과 낯설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분위기 조성이다. 창업, 일자리, 복지 등 예산 타령만 하거나 또는 권력적 정책 발상은 기본적으로 창조와 거리가 있다. 예산 없이도 가능한 것들이 많다. 1999년 외환위기(IMF 체제)를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사회분위기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잘 새겨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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