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가을은 투명한 햇살과 소슬한 바람, 여문 산색(山色)과 또랑한 풀벌레소리로부터 온다. 흰이슬이 맺힌다는 백로, 본격적인 가을에 드는 추분절기가 지나도 한낮 땡볕이며 어지러운 매미소리 등 여름의 잔해들이 저만치서 기승을 부리더니 엊그제 가을비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젠 완연한 가을이다. 누구라서 이 엄연한 계절의 순리를 거스를 수 있을 것인가.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김현승(金顯承) 시인의 시<가을의 기도>다. 시인은 구도자같은 정갈한 마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대서사시 <금강>의 시인 신동엽(申東曄)은 <초가을>이란 시에서 ‘덜 여믄 사람은/ 익어 가는 때,/ 익은 사람은/ 서러워 하는 때.’라고 읊조린다.
서러움이야 어찌 신동엽 시인 뿐이랴. ‘삼천포 시인’ 박재삼(朴在森)은 맘 속 깊게 흐르는 가을강(江)과도 같은 처연함을 그의 절창<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 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을 보겠네.’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이 그러하듯 청청한 가을 밤하늘은 가없는 그리움의 바다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일제 암흑기 저항시인 윤동주(尹東柱)의 가슴에는 그런 애틋한 그리움들이 가을 밤하늘 별처럼 아로새겨져 있었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울안 장독대에 내려앉아 한가로이 졸고있는 빨간 고추잠자리, 그리고 그 둘레에 시위하듯 늘어선 붉은 칸나꽃이며 맨드라미, 신작로가에서 너울대는 코스모스를 보노라면 문득 손톱에 빨간 봉숭아 물들이던 시집간 누이가 생각난다.
‘오-매 단풍들것네./ 장ㅅ광에 골 붉은 감잎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듯이 치어다 보며/ 오-매 단풍들것네.’
김영랑(金永郞)시인의 누이 마음처럼 그렇게 가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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