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오월(음력)이라 한여름 되니 망종 하지 절기로다/남쪽 바람 때맞추어 보리추수 재촉하니/보리밭 누른 빛이 밤사이 나겠구나/…/오이밭에 첫물 따니 이슬이 젖었으며/앵두 익어 붉은 빛이 아침볕에 눈부시다/…/아기어멈 방아 찧어 들바라지 점심 하소/보리밥 찬국에 고추장 상치쌈을 식구들 헤아리되 넉넉히 준비하소.’
<농가월령가>의 ‘5월령’이다. 물론 음력이다. 옛적 딱 지금 이맘 때의 시골풍경이다. 24절기의 하나인 망종(芒種, 6월5일)은 까끄라기가 있는 곡식 즉, 벼와 보리, 밀 같은 종자를 이르는 말이다. 이때가 되면 보리와 밀은 누렇게 익게 되고, 볏모는 자라서 심게 된다. 하지(夏至, 6월21일)는 본격적인 여름에 드는 절기로 일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
이 무렵에는 따비밭 한켠에 심어놓은 오이와 애호박 첫물을 딴다. 지금이야 시설하우스에서 시때 없이 오이며 호박이 나오지만, 저때에는 지주를 세우지 않고 밭고랑에 그냥 모종을 심어 덩굴이 제멋대로 땅바닥을 바알발 기어다녔다. 오이는 길쭉하고 검푸른 ‘왜(倭)오이’가 아니라 토종인 ‘조선(朝鮮)오이’만을 심었는데, 어른 손 한뼘가웃 크기에 통통한 몸집을 하고 연녹색의 피부빛깔을 가졌는데 아삭한 살집이 제법 두꺼워 오이채로는 그만이었다.
예전 어머니께서는 해가 중천에 올라 햇살이 따가워 “머리 벗겨진다” 소리가 나오기 전인 아침나절에 이슬내린 풀섶을 헤쳐가며 밭일을 보시고는 대나무소쿠리에 오이를 따다가 오이냉국을 만드셨다. 우선 오이 너댓개를 무채 썰듯 송송 썰어 커다란 양푼에 담는다. 그리고 물에 담가 불린 미역줄기 몇소끔, 고운 고춧가루와 깨소금을 곁들인 다음 양푼에 시원한 지하수 펌프물을 식구수를 요량한 만큼 붓고, 조선간장(집간장)과 시큼한 식초로 마지막 간을 한다. 이렇게 해서 새콤 시원한 ‘엄마표’ 오이냉국이 뚝딱 완성되었다.
추적추적 비라도 올라치면 할머니는 ‘비 오는 날은 공(空)치는 날’이라며 밀가루 반죽을 홍두깨로 밀어 칼국수를 만드셨다. 요즘처럼 바지락이니 멸치니 하는 것 없이 담장에 매달린 애호박 따다 숭숭 썰어넣고 소금 약간, 육젓새우젓 약간만으로 간을 한 것인데도 그렇게 구수하고 쫀득한 맛이라니…
그렇게 칼국수 한그릇을 비우고 대청마루 뒤 판장문을 열어젖히면, 뽀얗게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볏논 위에서 자맥질하듯 가로세로로 팔랑거리며 낮게 날아다니며 벌레사냥을 하는 제비들이 눈을 어지럽혔다. 무논의 개구리는 왜 또 속절없이 그리도 와글와글 울어대는지… 이 마른장마에 그려보는 ‘아, 옛날이여!’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