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등장인물 가운데 천 몇백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뭇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제갈공명(181~ 234)이다. 그는 위·오·촉 삼국이 중원을 놓고 각축을 벌이던 당대에 자신의 큰 뜻을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오장원(五丈原)의 별이 된 ‘비극의 히어로’였지만, 그의 따뜻한 인간미는 시대를 뛰어넘는 그의 가장 큰 매력의 하나였다. 뿐만 아니라 권력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검소하기 그지 없었다. 공명이 <출사표>를 지어올리고 마지막 출정을 하면서 유비의 아들인 촉왕 유선에게 글을 올렸다.
“저는 성도(成都)에 뽕나무 800그루와 마른 밭 15경(삼국시대 1경은 약 16,000평)이 있으니 소신의 가족이 살기에는 충분합니다. 저 자신은 군대 내에서 관급(官給)으로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으니 사재(私財)를 모을 필요가 없습니다.”
영영 못돌아올지도 모를 전쟁터에 나서면서도 ‘나나 내 가족 걱정말라’는 식이다. 지금도 그의 혼을 모신 중국 사천성 성도의 무후사(武候祠)에는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인격적으로나 지모로 봐서는 공명의 근처에도 못가지만, 우직하지만 말년 행적을 그런대로 봐줄 만한 우리나라 역사인물 중에 이용익(李容翊, 1854~1907)이란 이가 있다.
조선조 고종 때 탁지부 대신의 자리에까지 올라 친러파 우두머리로 천하를 호령하던 그는 원래 미천하기 짝이 없는 함경도 북청물장수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임오군란(1882) 때 민비의 장호원 피난을 계기로 민비와 고종과의 서신연락을 신속하게 잘한 공로로 고종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전국의 금광채굴권을 수십년간 장악하고 고종의 개인금고와 왕실 재정을 부담했다. 그는 거금을 쾌척해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를 세우기도 했는데, 정작 죽은 후 그의 후손들에게는 남긴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러시아 망명 중 실종된 그의 죽음처럼 참으로 알 수 없는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요즘 전두환 전대통령 일가의 숨겨둔 돈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법원에 낼 추징금 1,672억원을 내지 않고 월 29만원으로 생활한다는 그가 여전히 귀족같은 호화생활을 누리고 있는데다 재산형성과정이 의심스러운 그의 3남1녀 자식들 명의로 된 재산만도 어림해 1,000억원이 넘는다. 큰 아들은 나라 밖에 자금 도피를 위해 유령회사인 ‘페이퍼 컴퍼니’를 운영한 혐의도 받고 있다.
정말 ‘젊어서는 천년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江湖)를 더럽히는’ 낯가죽 두꺼운 철면피가 따로 없고, 염치를 모르니 사람의 탈만을 쓴 인두겁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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