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옛날 우리 전통사회에서의 갑·을(甲·乙) 관계는 사·농·공·상(士農工商)), 즉 선비·농부·공장(工匠, 장인)·상인의 네 계급 서열로 신분이 확실하게 나뉘어 있었다. 그 사회계급에서 지엄한 ‘갑 중의 갑’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선비, 즉 양반계급이었다.
‘양반에게는 부유하건 가난하건 유식하건 무식하건간에 온갖 경의를 다 표하지 않으면 안된다. 양반의 주택은 신성한 곳이어서 여자를 빼고는 마당에만 들어가도 죄가 된다.… 말을 타고 여행하는 서민은 양반집 앞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야만 한다. 여관에서는 감히 양반에게 말을 묻거나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다. 그 앞에서는 담배도 못피우며, 가장 좋은 자리를 내어 주어야만 하고, 양반이 편안하도록 스스로는 불편을 당해야만 한다….’
<조선교회사> 서론에서 기술한 최상류 특권층 양반계급의 행태다. 비록 몰락해 해진 옷과 부서진 갓을 쓰고 비루 먹는 양반이라도 자자손손 그 신분이 세습되었고, 체면치레 하나만으로 알량한 존엄을 지켰다.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친다’ ‘양반은 냉수 먹고도 이 쑤신다’ ‘양반은 얼어죽을지언정 절대 곁불(짚불)은 안쬔다’는 속담은 그래서 나왔다.
그 후로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최대의 화두(話頭, 말머리)는 단연 갑·을 관계다. 사회적 강자와 약자 사이에 형성된 수직적 서열화는 ‘갑 중의 갑, 갑과 을, 을 중의 을을 통칭한 갑을문화’라는 희한한 조어(造語)를 파생시키고, 연일 신문지면과 TV,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주차문제로 관리원을 폭행한 프라임 베이커리의 ‘빵 회장’, 기내식으로 나온 라면을 가지고 승무원에게 생트집을 부린 포스코 임원, 밀어내기로 대리점주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남양유업과 배상면주가, 국가 원수를 수행해 미국 국빈방문 중 현지 인턴여대생을 성추행 한 윤창중 스캔들 등등이 병든 우리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다.
지금 우리사회에는 소위 ‘감정노동자’가 600여만명이나 된다. 호텔종사자, 은행원, 텔레마케터와 콜센터 안내원, 백화점 점원 등 대다수가 서비스업계에 종사하는 취약계층의 여성들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가진 자들, 힘있는 자들에게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정말 하루살이처럼 살아간다. 그 속에서 참혹하게 짓밟힌 인권은 그 어디에서도 피어나지 못한다. ‘국민행복시대’는 한낱 잠꼬대로만 들린다. 가진 자들의 진정성 있는 배려와 아량은 실종된 지 오래고, 승자들은 여전히 주린 승냥이처럼 독식의 이빨을 갈고 있다. 정말 ‘사랑으로’ 우리 모두가 함께 갈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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