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미안하다. 너무 힘이 든다. 다시 못 본다고 생각하니 섭섭하다. 내가 죽고 나면 너희 어머니가 요양원에 가야 하니 내가 운전할 수 있을 때 같이 가기로 했다. 이 길이 아버지 어머니가 가야 할 가장 행복한 길이다…’
여든여덟의 할아버지가 여든셋의 할머니와 이승을 하직하며 그동안 같이 지내던 쉰다섯살 막내 아들에게 남긴 유서다. 할아버지는 유서의 끝머리에 자식과 손주들 이름을 일일이 적어 부르며 작별인사를 남겼다.
이 일은 지난 13일 경북 청송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모 할아버지는 4년 전부터 치매를 앓아온 할머니와 함께 승용차를 타고 마을 인근의 산골 저수지에 돌진해 숨졌다. 늘 손을 꼭 잡고 다닐 만큼 금실이 좋았던 노부부였지만 아내의 치매로 할아버지가 힘들어 했고, 정신이 온전할 때 부부가 자살을 약속한 것 같다는 게 경찰의 얘기다.
살림형편으로 보면 남부러울 게 없는 부농(富農)이다. 사과·복숭아 과수원이 6만여평에 이르고, 함께 일하는 종업원 만도 50~60명에 달해 몇해 전부터는 경북도에서는 손꼽는 억대 부농에 이름이 올랐다. 빈곤, 살기 어려워… 등등의 일반적인 노인 동반자살과는 그 예가 사뭇 다르다.
평소 할아버지는 어려운 이웃에 베풀어 가며 성실하고 소박하게 살아 마을주민들은 ‘본받을 점이 많았던 어른들’로 기억하며 노부부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세상에 남겨진 3남2녀의 자녀 중 막내아들은 교사생활을 접고 내려와 4년 전부터 과수원 농사일을 도왔고, 할머니 또한 이따금 대·소변을 가리지 못할 때는 있었지만 정상인에 가까워 지난 8일 어버이날엔 할머니가 경로당에 쌈짓돈을 내놓아 주민들이 닭백숙을 끓여 먹었고, 또 지난 3월엔 마을어른 30여명과 함께 노부부가 손을 꼭 잡고 부산 나들이를 다녀오기도 해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자신이 먼저 죽고 난 뒤 혼자 남을 할머니를 걱정해 동반자살의 길을 택한 것이 분명하다. 이와는 형편이 다르지만, 남편 혹은 부인 어느 한쪽의 치매로 ‘같이 죽어야지’ 결심 끝에 동반자살하는 노부부 사례가 최근 부쩍 늘어나고 있다.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거나 혼자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느니 사랑하는 배우자와 함께 마지막 길을 가고 싶다는 심리가 동반자살을 부른다는 게 공통점이다.
전국에 치매환자는 대략 54만 여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의 심리와 정서 치료를 위해 서울의 일부 지자체에서 ‘치매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대서 화제다. 종이접기, 색칠공부, 글쓰기, 사물놀이 등 어린아이 유치원처럼 기초교육과 사회성을 익히게 한다는데, 부모 병들어 ‘치매유치원’ 보내느니보다 건강할 때, 시쳇말로 ‘있을 때 잘해!’가 진정한 정답이 아닐까. 아랑곳 없이 가정의 달 5월의 하늘은 푸르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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