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식구덕이란 말이 있다. 흔히 쓰이는 말은 아니지만 조상의 공덕으로 자손이 영화를 누리는 일을 말한다. ‘식덕(食德)’으로 줄여 쓰기도 하는 걸 보면 조상의 여러 음덕(蔭德) 가운데서도 먹을거리를 첫손에 꼽은 것으로 보인다. 하기야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 자자손손 굴뚝에 연기가 끊이지 않게 하는 건 사투(死鬪) 그 자체였다.
곤궁한 살림살이에서는 꿈꿔 보지도 못할 일이지만 그런대로 삼시세끼를 챙길 수 있었던 집안에서는 할머니 또 그 할머니의 할머니 대에서부터 그 집안의 내력과 함께 ‘손맛’이 대물림되어 내려왔다.
소설·대설·동지·소한·대한 절기가 끼어 있는 요즘같은 추운 겨울철에는 지역, 집안에 따라 독특한 별식이 있었고, 기나긴 겨울밤 헛헛함을 달래주는 군음식들로 입호사를 누렸다.
가시리묵·도토리묵·메밀묵·수수부꾸미·감태·사연지·오분자기젓·굴생채·굴회·꿩김치·김치주저리·동치밋국·김치말이국수·수정과·식혜 등의 음식들이 곧 그것이다.
가시리묵은 11~1월 바닷가 바위에 기생하는 해조류의 일종인 가시리를 물을 부어 4시간 이상 끓여 걸쭉해 지면 고운 체에 걸러 소금 간을 한 뒤 네모난 묵틀에 부어 굳힌 것이다. 강원도 주문진 이북에서는 푸른색, 강원도 옥계와 경북 울진 남쪽에서는 흰색인 것이 특징이다. 도토리 가루와 메밀가루로 만드는 도토리묵·메밀묵은 일종의 구황(救荒) 음식이었지만 한 겨울밤의 허기를 달래주던 별미 야찬이었다. 묵의 모를 손가락 굵기로 길쭉길쭉하게 썰어 큼지막한 양푼에 넣고 나박나박 썬 잘 익은 김장김치, 고춧가루, 참기름, 깨소금으로 버물버물 양념해 먹는 맛은 꿀맛이 따로 없었다.
수수부꾸미는 또 어떤가. 수숫가루를 반죽해 팥소를 넣어 반으로 접어 반달모양으로 만든 다음 참기름 두른 무쇠솥뚜껑에 지진 떡인데 두어개 만으로도 든든한 요기가 되었다. 조기·낙지·전복·굴 등의 양념 김치속을 배춧잎에 싸서 넣은 백김치인 사연지는 안동지방 고유의 이 시절 별미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명절 때 먹다 남아 굳어진 인절미를 기름두른 프라이팬에 올려 눅진눅진 노릇노릇 구운 다음 새콤 시원한 얼음둥둥 뜬 동치밋국을 곁들여 먹던 맛이야말로 군것질거리가 별반 없었던 아이들에게는 천상의 선물같은 것이었다.
이제 겨울도 시름시름 깊어가고 한 해가 기우는데 그 시절 그 맛을 찾아볼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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