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런트 사미자

순발력과 기지, 능란한 성대모사로
성우·탤런트 겸업 성공

탤런트 사미자는 일찍이 동아방송 1기 성우를 거쳐 탤런트로 전업, ‘내사랑 내곁에’ ‘부자의 탄생’ ‘천만번 사랑해’ ‘너는 내운명’ 등 다수의 영화와 TV드라마에 출연했다. 그리고 제9회 대종상의 조연상 수상 등 다수의 수상기록을 가지고 있다. 애교가 있고 재치가 있는 연기로 팬들을 사로 잡아온 사미자를 만났다. 그녀는 ‘살수록 행복해 지는 사미자의 짭짤한 삶’을 주제로 그간의 연기인생을 재미있게 얘기해 줬다.

어머니 간청으로 외상 공부
그는 47년간 정확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 표출해 내기 위해 최선의 연기생활을 해왔다고 밝히면서 성공 뒤에는 어머니의 힘이 많았다며 노고를 칭송했다.
“성공을 일궈낸 저도 대견하지만 어머니의 힘이 더욱 대견하다고 생각합니다.  평생 어머니의 노고를 잊지 않으며 살고 있어요.”
어머니의 힘은 무척 대단해 큰 버팀목이었다면서 어머니가 쓰러지면 가정이 쓰러진다며 어머니를 잘 모셔야 된다고 했다.
그녀는 열살 때 6·25한국전란을 맞았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이화여중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편모슬하이던 그녀는 입학금을 내기 힘든 가정형편에 전전긍긍 안달을 했다. 위로 오빠가 서울대에 재학중이라 오빠 학비 대기도 빠듯한 처지여서 어머니의 눈치만 보며 가슴을 태웠다. 행주치마만 벗으면 외출복이 되던 가난한 시절, 엄마는 등록금 마감 며칠 전 행주치마를 벗어 내동이치며 결연한 모습으로 횡하니 나섰다.
사미자는 무슨 일인가 겁을 먹으며 엄마 뒤를 밟았다. 이화여중 교장실에 들어선 어머니는 선생님에게 90도 각도로 절을 했다. 어머니는 사미자의 입학등록금을 가을 추수 뒤 갚겠다며 머리를 조아렸다. 이때 사미자는 어머니가 굽실거리는 모습이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못마땅 했다.
가을추수 뒤 외상으로 입학금을 갚겠노라는 어머니의 담대한 간청으로 입학을 허락받은 사미자는 헌책을 구해 밑줄쳐진 부문을 달달 외우며 열심히 공부했다. 오빠가 입던 헌 속옷을 줄여 입으며 컸다.
고교입학도 쌀 3가마 값을 외상으로 가까스로 입학을 했다. 이처럼 어머니의 힘으로 학교공부의 역경을 헤쳐냈다.

가난 속에 찾은 성우의 길
사미자는 이화여대 진학의 꿈을 저버리지 못해 1학년1학기까지 영문학과 도강(盜講)수업을 해낸 열정의 촌극도 발휘했다.
결국 입학금을 마련 못해 대학진학의 꿈을 접고 취업을 했다. 그때 가난한 지금의 남편 김관수 씨를 만났다. 남편이 갖다준 쥐꼬리만한 돈으로 쌀이 떨어져 친정에 갔던 사미자는 어머니로부터 든든한 음식을 받아 먹었다. 이때 남편을 불렀으나 어머니는 밤에 오라고 일렀다. 저녁에 들른 사위에게 딸처럼 든든한 밥상을 차려냈다. 그리곤 두 내외에게 쌀봉투를 내줬다. 사위를 저녁에 부른 것은 가난한 딸의 모습을 이웃에게 보이기 두려웠던 탓이었다.
이때 우연찮게 동아방송1기 성우모집 전단지를 본 사미자가 한달음에 동아방송에 응모했다. 중학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사미자가 글을 읽을 때 어머니 목소리와 남자아이의 목소리 성대모사를 하는 특기를 보고 배우가 될 것을 격려한 것을 상기, 성우모집에 응한 것이다.

순발력으로 성우사퇴 위기 넘겨
지금 47세가 된 큰딸이 6개월이던 시절, 어머니는 손녀가 하루종일 울며 보채는 것을 달래기 힘들어 동아방송 스튜디오로 찾아왔다. 우유 살 돈이 없어 물만 먹였으나 허사, 보채는 손녀를 업고 어머니가 나타난 것이다. 성우모집시 채용조건으로 고교졸업자에 미혼자여야 한다는 규정을 어기고 가까스로 입사한 상황이라 사미자는 어머니와 딸 희주를 데리고 화장실로 피해 갔다.
문을 채우고 젖을 물렸으나 긴장한 탓인지 젖이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아이는 더 크게 울었다. 이때 성우동기 전원주가 사미자를 찾아오라고 지시를 받고 화장실로 찾아와 노크를 크게 했다. 할 수 없이 문을 열어주자 전원주는 사미자에게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입을 틀어 막으며 이를 발설하지 말 것을 요구했으나 전원주는 동료와 PD에게 이를 알렸다.
이때 나타난 PD는 사미자를 쳐다보며 “어떻게 할거냐?”고 추궁했다. 순간 사미자는 순발력을 발휘, 아이를 꼭 껴안으며 “희주야 아구까꿍 아구까꿍” 몇차례 을렀다. 이때 천우신조인 양 딸은 방긋방긋 웃었다. PD는 사미자가 기혼자임을 잠시 잊고 자신도 딸을 안으며 아구까꿍 까꿍하며 어르다 아기와 함께 크게 웃었다. 그런 뒤 PD는 노기를 풀고 “내일 10시에 A스튜디오에 집합하시오”라며 돌아갔다.
“딸이 나를 살려낸 것이지요.”라며 그는 옛날의 어려운 국면을 추억해 냈다.

TV진출…본격 연기자의 길로
64년쯤 사미자는 확실한 성대모사 장기에다 얼굴이 받쳐주며, 순발력이 있는 연기를 한다는 소문을 들은 TV PD에게 픽업돼 TV출연의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TV출연 제의는 가뭄에 비오듯 했다. 언젠가 오현경, 도금봉 주연의 ‘부인은 부재중(不在中)’이란 드라마에 대사 한마디만 하는 단역 출연제의를 받았다. 그녀는 이때다 작심하고 PD·작가와 사전 상의를 않고 전라도사투리를 구사, 대사 몇마디를 추가하며 애교있는 연기를 해냈다. 그때 그녀의 능청스런 연기에 홀린 작가는 도금봉에게 가야할 연기부문을 사미자에게 넘겨주며 그녀를 중용(重用)했다. 그리곤 허장강의 칭찬과 찬사에 힘입어 바쁜 출연기회를 얻어 본격적으로 연기자의 길에 들어서서 오늘에 이르렀다.

긍정적 사고가 희망 일궈
성우와 탤런트 겸업으로 돈을 벌자 천만원을 꿔달라는 사람은 못꿔줘도 200~300만원 정도는 거절 못하고 수많은 사람에게 빌려줬다. 되받지 못한것도 숱하다고 했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의 사업수발로 여러차례  많은 돈을 날렸다.
그녀는 그런 고초를 맘에 두지 않고 희망을 걸고 긍정적으로 산다고 밝혔다.
특히 남편이 갖다준 20년 월급을 한푼도 건드리지 않고 몽땅 남편에게 건네줘 기를 살리고 암에서 구해준 것은 큰 보람이었다고 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오붓한 삶을 사는 요즘 생활이 마냥 즐겁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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