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전의 ‘자산어보’전기체 역사소설로 펴 낸 오세영 작가

‘자산어보’는 중국을 포함  당대의 어떤 어보(魚譜)보다 뛰어나
 정약전이 조선의 재벌과 맞서 싸우다  유배된 대립의 모습 감동

<자산어보(慈山魚譜)>는 정약전(丁若銓)이 1814년에 펴낸 바다 물고기 관련 어류학서(魚類學書)이다. 정약전은 이 책을 흑산도 유배지에서 썼다. 관직을 뺏기고 가족과 떨어져 되돌아 갈 수 없는 망망대해 외딴섬에서 절망에 주저앉지 않고 써냈다.
정약전은 비탄과 고독을 곱씹으며 바다를 찾아 물고기, 조개, 해조류 등을 관찰, 크기와 형태, 습성을 <자산어보>에 담아냈다.
역사를 공부한 소설가 오세영(吳世永)은 정약전이 아픔을 딛고 치열하게 <자산어보>를 엮어가는 모습을 ‘자산어보’라는 같은 이름의 소설로 펴냈다.
그를 용인 중앙도서관에서 만났다.

물고기 족보 펴낸 정약전의 열정
먼저 정약전은 어떤 인물이었는가를 물었다. “정약전은 조선후기 실학자로 널리 이름을 떨친 다산 정약용의 둘째 형입니다. 그는 천주교를 믿었다는 사실과 악질 거상(巨商)들을 배척했다는 이유로 동생 정약용과 함께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흑산도에 유배되었습니다.”
나주에서 강진으로 유배된 아우 정약용과 눈물을 흘리며 작별을 한 정약전은 배를 타고 흑산도로 끌려갔다. 흑산도는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 힘든 곳이다. 영조는 정약전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아무리 중죄인이라도 흑산도에는 보내지 말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벽파의 미움을 사 절해고도 흑산도로 끌려갔던 것.
망망대해 외딴섬에서 고독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 그러나 정약전은 주저앉지 않았다.
정약전은 이백의 시 ‘하늘이 나의 재주를 만들 때는 반드시 쓰일 곳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되새기며 새로운 삶을 개척 <자산어보>를 쓰게 된다.
<자산어보>는 정약전이 흑산도 청년 창대의 도움을 받아 1814년에 저술한 어류학서로 3권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는 비늘이 있는 물고기 73종, 비닐이 없는 물고기 43종을 비롯해 흑산도 인근 물고기와 해조류, 조개 등의 모양과 습성, 분포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대의 그 어떤 어보도 따를 수 없는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정확한 관찰과 분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추구했던 실학자 정약전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저술하는 외에도 유배지에서의 삶을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개척해 나갔다.

좌절한 인재 발굴, 나라의 동량으로 육성
‘복성재’라는 서당을 짓고 후학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적서(嫡庶) 즉 적자와 서자의 차별이 엄격했던 신분사회에서 좌절한 젊은 인재를 발굴해 나라의 동량으로 다듬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멀리 오키나와와 필리핀까지 표류하다 돌아온 어민들을 위로 격려하며 외국사람들의 풍속과 언어를 전해듣는 등 외딴 섬에서의 기약없는 나날을 극복해 나갔다.
동생 정약용이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중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을 저술하며 결코 헛되이 보내지 않았듯이 정약전도 굳건히 유배생활을 해냈다.
그렇지만 정약용은 유배가 풀려 다시 한양으로 올라간데 반해 형 정약전은 16년의 유배생활 끝에 다시는 뭍을 밟지 못한 채 흑산도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당시의 얘기와 시대상 그려 낸 것 행복
“소설 ‘자산어보’는 전기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는 역사소설입니다. 그러니까 정약전의 삶을 소재로 하면서 따로 필요한 부분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보완을 한 것이지요.”
소설은 정약전이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던 19세기 초반, 개혁을 추진했던 정조시대가 가고 민란과 외척의 시대로 대변되는 순조의 시대, 안동김씨가 득세를 하고 홍경래 난이 발생하던 때의 시대상을 그려내고 있다.
당시 조선은 거부들의 출현시기로 그들은 요즘의 재벌처럼 행세하고 있었다. 정약전은 아우 정약용과 함께 이들 거부들의 상권독점과 약탈을 막는 비판 담론을 펴다 유배가 되었다.
오 작가는 소설 ‘자산어보’에서 정약전이 새롭게 등장한 조선의 재벌과 맞서 싸우다 흑산도에 쫓겨난 대립저주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또 흑산도민들이 잡은 조기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한양으로 유통되었으며 한양의 경상(京商)들이 어떻게 재벌이 되었는지도 풀이해 주고 있다.
그리고 홍경래 난은 조선에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패한 사람들은 어찌 되었는지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오 작가는 ‘자산어보’를 쓰게된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자산어보> 및 복성재와 더불어 그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느껴 소설 ‘자산어보’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소설형식을 빌린 것은 ‘행간(行間)의 기록’을 상상력으로 되살리는데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도서관에서 자료를 뒤지고 인터넷을 검색하는 등 관련 사료(史料)를 모으면서 정약전이 느꼈던 고뇌와 갈등극복을 경험하게 된 것이 큰 기쁨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산어보>의 가치를 절실히 느낀 것도 보람이었다고 했다.
한편 그는 성리학에 젖어있던 조선사회에서 실용서인 물고기에게 족보를 만들어 주는 일을 해낸 정약전은 당시 상황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저술활동이었다고 했다. 그의 <자산어보>는 중국을 포함해서 당대의 그 어떤 어보(魚譜)보다도 뛰어난 과학서였다고 극찬했다.
또 오 작가는 역사소설을 쓸 때마다 기록되지 않은 사실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우는 일에서 희열과 고통을 맛본다고 했다.
아울러 소설 ‘자산어보’를 쓰는 내내 정약전과 나누었던 대화들, 함께 겪었던 희로애락을 되새기며 행복에 젖어들었던 것은 작가만의 특권이었노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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