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참상·연민 담아 ‘소년시대’ 기록사진전 연 원로 사진작가 최민식

삶의 참상과 연민을 담아 구원의 메시지 전하는데 주력
국가기록원에 작품, 책자, 비품 기증…최민식 전시관 설치

한국사진예술계에서 다큐멘터리사진의 제1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 최민식 작가다. 올해 85세인 그는 고단한 사람들의 억척이 짙게 묻어나는 모습만을 고집스레 찍어오고 있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는 더없이 따뜻한 인간의 체온과 처연한 삶의 모습이 엿보인다.
지난 6월13일부터 7월8일까지 서울 롯데백화점 갤러리에서 ‘소년시대’라는 주제의 개인사진전이 열렸다. 어린이 모습 만을 골라 내건 전시장에서 그를 만났다. 밀려드는 TV촬영진과 각 미디어의 쇄도하는 인터뷰로 7월3일과 4일 연이틀 찾아가 가까스로 시간을 얻었다. 기자는 그의 사진에 대한 짙은 애정과 집착을 들으며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

화가의 길을 밟다 사진작가로…
그는 원래 화가의 꿈을 안고 195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중앙미술학원을 다녔다. 최민식 작가는 헌책방에서 미국인 작가 에드워드 스타이겐의 사진집인 ‘인간가족’을 접한 뒤 사진작가가 되기로 맘 먹고 지금껏 사진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는 사진을 이런 것이라고 했다.
“사진은 순간의 촬영으로 ‘영원’의 메시지를 담습니다. 사진에는 작가의 정신과 시대상을 담아 역사기록으로 남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사진은 살아있는 진실을 담아야 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꾸며대고 조작하면 안됩니다. 진실을 담아야 보는 이가 감동을 합니다”
그는 평생 인간을 테마로 해 인간의 진실한 애환이 담긴 삶의 모습만을 고집스레 찍어낸 사진집 14권을 출간하기도 했다.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생선을 만지던 비린 손이 아이에 닿을까 손을 뒤로한 채 딸아이 등에 엎힌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 모습을 찍은 사진.(1969년작)>

가난한 사람의 애환을 주로 담아
그는 평생 돈이 되는 풍경, 광고, 누드사진을 찍지않고 오직 곤궁하고 피폐한 사람들의 모습만을 찍어 생활비를 못 마련해 가족에게는 어려움을 주고 가정을 망친 사람이었다고 자책했다.
서민의 애환만을 담은 사진작업은, 이남에서 이북땅이 된 황해도 땅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7개월은 밥을 먹고, 5개월은 죽만을 먹는 혹독한 가난을 겪은 사람이었기에 가난한 사람의 모습만을 찍는 게 가능했다고 했다.
“돈이 있는 부자였다면 이런 작업을 절대 안했을 겁니다. 나와 가난한 사람의 연민을 담아내고자 빈자의 모습만을 찍게 된 것입니다.”

새마을운동에 저촉, 작품집 판금
그는 늘 가난한 사람들의 궁핍한 모습만을 찍어 박정희 대통령이 열심히 이끌어 온 새마을운동 정신에 저촉된다 하여 사진집 5권이 판매금지 되었다.
뿐만이 아니라 그간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등 7개국에서 작품전시 초청이 있었지만 박정희 정권에서 전두환 정권까지 여권을 발부해 주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권발부 해금은 노태우 정권 말기부터 시작, 김영삼 정부 이후 김대중 정부때 완전 해금되면서 문화훈장에 이어 국민포장을 받았고, 문화상 15점을 받는 등 뒤늦게 작가로서의 영예를 얻었다. 그는 작품집 판금과 여권이 발부되지 않는 혹독한 탄압을 받아 생활비를 마련 못하는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마침 72년 왜관에 있던 베네딕토수도원에서 분도출판사를 운영하던 독일인 임세바스찬 신부가 찾아와 13년간 매월 30만원을 주고 작품을 가져가게 되면서 생활의 숨통을 텄다고 했다.
30만원이 오면 10만원은 아내에게 생활비로 주고, 20만원으로 전국 순회 촬영작업 뒤 임세바스찬 신부에게 사진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김대중 정부에서 해금이 되고 난 뒤인 90년 부산일보, MBC 등 기관과 뜻있는 기업인들이 사진출사여비를 내주어 외국출장작업을 하는 등 작품활동에 탄력을 얻었다. 그리고 부산대학과 인제대학 등의 출강과 도서관, 문화센터, 지자체 등에서 특강요청이 쇄도하면서 생활이 폈다고 했다.
그는 이번 ‘소년시대’ 주제의 전시작품에 대해 이런 말을 해줬다.
“우리 인간중에서 가장 작고 가장 약한 구성원인 어린이들이 타락한 세상의 죄에 대해 가장 큰 대가를 치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 세상 거대집단 사이에서 가장 낮은 대우를 받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바로 오늘부터 우리 어린이들에게 관심과 존중과 헌신을 보내줘야 합니다. 저는 그동안 길위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잠든 ‘소년’ 그리고 지금은 노인이 된 사람을 찍어왔습니다. 휴머니즘은 제 사진창작의 중심이었습니다.앞으로도 계속 사진을 통해 제 사상이 대중의 마음속에 깊이 울려퍼지도록 매진하겠습니다.”

가난구제를 호소하는 작품 제작
그는 이어서 그가 작품활동에 임해온 자세를 이렇게 풀이해 줬다.
“나의 사진에 들어있는 수많은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어린이들의 얼굴에서 나는 내 부모와 동생, 자식의 모습을 연상합니다. 나는 내가 찍은 사진들 속 인물들에게 굉장한 연민을 보내게 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진을 찍지 못했을 겁니다.”
그는 이어서 세계의 유명작가들, 지구촌 곳곳을 순회, 빈민의 삶과 재난 참상을 찍는다. 특히 아프리카 등 핍박받는 사람들을 찍어 작품집 발간과 전시회를 연다. 이는 영예를 얻기보다는 세계인에게 반성과 가난구제를 호소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우리도 이런 작가, 특히 브라질의 살가도와 쿠텔카와 같은 작가가 배출되어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을 도와주는 포토저널리즘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고발캠페인이 번져가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는 여러 젊은이들이 그를 많이 찾아온다고도 했다. 젊은이들은 예쁜사진 찍는데에만 관심이 커 인간의 애환이 담긴 다큐작업을 하려는 후계자를 좀체 못 만나 안타깝다고 했다.

국가기록원에 작품과 비품 기증
그는 2006년 국가기록원에 15만점의 작품을 기증하였다. 기증은 대학교수 5명과 기록관계전문가 3명 등 8명의 심의끝에 만장일치로 통과해 기록원에 들어갔다.
앞으로 10만컷의 작품과 카메라 등 비품, 관련책자 등이 계속 기증되어 특별전시실에 소장전시될 예정이라는 것. 역대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최민식 작가의 작품소장이 개인으로서는 처음이라고 한다. 그는 화가, 음악가 등 60명에 국한된 예술원 회원으로 추대되어 원로작가 보조금으로 월 70만원을 받고 있다. 그는 앞으로 그의 사진작업 계획을 이렇게 밝혔다.
“아직까지 눈이 맑고 귀가 어둡지 않아 잘 듣고 건강한 걸음을 할 수 있어 5~6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지금까지 내온 작품집 14권에 이어 17권까지 내볼 생각입니다. 나에게 있어 사진창작은 삶의 문제를 의식, 이해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삶의 참상과 연민을 담아 구제의 메시지를 알리는 것이 내 사진작업의 중심이 되어야 된다고 봅니다. 따라서 딱하고 힘든 사람의 모습 조명에 더욱 힘쓰겠습니다.”
그의 확고한 의지가 엿보이는 굳건한 다짐에 무한한 감동과 신뢰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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