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장군 책 네권 펴낸 김종대 헌법재판소 재판관

 어머니는 장군 입신시키고자 전가족 친정 솔가(率家)
 장군이 국사 소홀히 할까봐 병영 인근에 기거
“충무공의 애국관과 리더십은 이 시대 구국 약제”

김종대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1973년부터 법관생활을 해온 법조공인(法曹公人)이다. 그는 1975년 책방에서 이순신을 만난 뒤 장군의 출중·탁월한 애국관과 리더십에 매료되어 장군의 생애와 사상을 국민에게 알리는 전도사역을 해오고 있다.
그는 2002년 이후 지금까지 장군의 얘기를 네 권의 책으로 펴냈다.
금년 4월 네번째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라는 최신작을 펴낸 김 재판관은 “이순신 장군 어머니가 장군보다 더 훌륭하고 위대해 장군을 효자와 충신으로 키워냈다”고 힘주어 말했다.

김 재판관은 장군과의 인연을 이렇게 밝혔다.
“75년 봄 서울 어느 책방에서 장군을 만난 뒤 지금껏 저는 늘 장군을 가슴에 품고 삽니다.”
그는 장군 존경에 흠뻑 빠져 40여년 공부에 빨려들며 행복했다고 했다. 본지와 인터뷰이니만큼 장군보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어머니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충무공은 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효자
김 재판관은 장군은 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훌륭한 효자라고 했다.
“장군은 병영진중(兵營陣中)에 있으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어머니에게 못 드리는 아쉬움을 ‘난중일기’에 써 놓았습니다.”
장군이 전라좌수사 부임 1년 뒤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이때 장군은 여수 진남관에서 사령관으로 근무하면서 배를 만들거나 수리를 하는 10km밖 선소(船所) 인근 5km 거리에 어머니가 기거 할 집을 마련해 어머니를 모셨다.
어머니가 장군 가까이 간 것, 그것도 왜군첩자들의 살해위험이 있는 최전방의 장군 가까이 간 것은, 장군이 국사(國事)를 소홀히 할까봐 독려를 하기 위한 충정이었으며, 이는 어머니의 자식성공프로그램의 하나였다고 학자들은 얘기한다고 했다.
장군은 임진왜란 발발 다음해부터 한산도에서 4년 기거 후 감옥에 가기까지 5년간 어머니를 가까이에서 모셨다.
장군은 5년동안 자신이 직접 찾아 가 어머니를 만난 것은 출장중 서너차례 뿐이었다는 것. 장군은 부하, 조카를 통해 어머니가 편안하다는 얘기를 들으면 즐거워 하고 감기증상으로 안좋으시다는 얘기를 전해 들으면 걱정이 태산, 자나깨나 어머니 걱정을 절절히 했다고 한다.

지극한 사랑으로 장군을 키워낸 어머니
김 재판관은, 어머니가 장군보다 더 훌륭하고 위대해 장군을 효자와 충신으로 키워냈다고 했다. 장군의 성공 뒤엔 초계 변씨(卞氏)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어머니 얘기를 들려줬다.
어머니는 충남 아산태생으로 장군의 집에 시집와 아들 넷을 뒀는데 장군은 세째아들로 컸다. 장군의 집은 서울이다. 할아버지대에 벼슬이 끊겨 무척 가난했다. 어머니는 가난으로 장군을 교육시킬 엄두가 안나자 무역·물류사업을 하는 윤택한 아산 친정으로 남편, 자식, 며느리 등 가족 모두를 이끌고 솔가(率家)를 한다.
유교 윤리가 지배하던 시대에 어머니는 여자로선 좀체 하기 힘든 솔가를 한 것이다. 어머니는 억척같이 일을 해 많은 부를 일군다. 어머니는 장군을 무관출신 방씨 가문에 장가를 보내고 무과에 급제를 시킨다.
어머니는 장군이 장인·장모의 제사를 지내도록 종용하고 윤택한 처가를 잘 돌보도록 조언한다. 이런 어머니의 노고로 장군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재산분배가 있었는데, 장군은 노비까지 많은 재산을 물려받는 은혜를 누렸다.

아들 옥바라지 하러가다 익사한 어머니
장군은 선조 30년 한산도에서 함거에 실려 압송, 한양으로 올라가게 된다.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고 장군의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한양행을 결심한다. 만 83세 노구에 작은 배를 빌려 남해와 목포를 거쳐 서해바다를 거슬러 한양으로 가다 풍랑을 만나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어머니는 평생 노심초사 장군을 돌봐주다 불우하게 세상을 등졌다. 그러나 어머니는 위대한 장군을 키웠다. 영웅 뒤엔 더 큰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나랏일을 하는 자식을 충신으로 키우기 위해 꽃을 키우듯 정성으로 장군을 돌봤다.
김 재판관은 장군어머니의 자녀교육 정신을 오늘에도 되살려야 된다고 역설했다.

충무공은 공직자의 사표(師表), 성공한 지도자
김 재판관은 ‘장군은 이런 사람이었다’고 정의(定義) 평가해 줬다.
첫째, 장군은 사물의 본질에 대한 깊은 자각과 수양을 바탕으로 대인격을 이룬 성자요 군자라고 했다.
둘째, 장군은 모든 공직자의 사표(師表)라고 했다. 사표의 실례로 장군은 한때 파직(罷職)하여 불우한 생활을 했다. 이를 딱하게 본 유성룡 장군이 이장군에게 같은 덕수 이씨 종친인 율곡이 이조판서로 있으니 찾아가 복직청원을 할 것을 종용했다. 장군은 적절치 않다면서 율곡을 찾지 않고 자기 힘으로 세상을 헤쳐나가는 단호하고 강력한 의지를 보였다.
이로 미루어 그는 자신의 이익보다는 나라와 백성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공직자의 사표라는 것.
셋째, 장군은 최악의 여건속에서도 구국(救國)이라는 목표달성에 성공했고, 열세의 조선 수군을 강군으로 키운 가장 성공한 지도자라고 했다.
특히 장군과 원균과는 라이벌로서 많은 악연을 갖고 있다. 김 재판관은 장군과 원균의 인격적 품성과 복무자세를 이렇게 비교 설명해 줬다.
“정유년 초 원균의 모함과 왜적간첩 오시라의 술수로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쫓겨나 원균에게 자리를 뺏깁니다. 원균은 2월 통제사의 자리를 맡은 뒤 7월 왜군과 접전,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합니다. 이때 원균도 전사합니다. 당시 조선수군은 180척 전함과 거북선을 잃고 수군 만수천명이 전사합니다.”
이때 조정은 장군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 한다.
장군은 아군 패잔병 1/10을 모으고 배술장군이 감췄던 배 12척을 찾아 율돌목 지형을 이용, 한달내에 왜적을 물리친다. 승인(勝因)은 장군이 군작전소의 문호를 개방, 졸병에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맞아들여 그들이 제의하는 묘책들을 귀담아 듣는 소통의 리더십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한편 원균은 군작전소에 담을 쳐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기생을 데려와 유흥장으로 만든다. 원균은 유흥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부하로부터 군면제 대가로 뇌물을 받으니 약군(弱軍)이 되어 전쟁에서 진 것이라고 했다.
끝으로 김 재판관은 “장군의 이같은 지도력은 이 시대 병약한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됩니다. 정치인, 기업인, 학생 모두가 이 훌륭한 덕목을 이어받아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충무공 애국사상 구국약제로 삼아야
김 재판관은 자신의 저서를 젊은이를 비롯 국민 모두가 서문(序文)만이라도 읽어 충무공 정신을 이어가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리고 특히 언론인들이 장군의 위업과 지도력을 널리 선양, 홍보하는 일에 앞장서는 전도사가 되어 줄 것을 간청하기도 했다.
그는 퇴임 후 충무공의 애국사상을 구국 약제(藥劑)로 삼아 어린이용 당의정(糖衣錠)과 성인용 주사제(注射劑)로 쓰는 계도교재 만들기와 강연활동에 나설 것이라며 한껏 들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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