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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주] 조기통일전망, 북한주민 정착 준비 서둘러야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김일주 이사장
채희걸  |  jsssong6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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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6.1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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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말못할 가혹한 핍박과 억압을 피해 자유를 찾아온 북한이탈주민들은 2011년 9월 현재 22,457명에 이른다.
이들은 자유를 찾아왔지만 버스를 타고 내리는 일에서부터 직업을 얻는 일까지 북한사회와 너무 다른 환경을 극복해야 되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은 이들 이탈주민들의 크고작은 어려운 일을 돕고 안정적인 삶을 찾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이 재단의 김일주(金日柱)이사장을 만나 그가 이 재단운영을 맡게 된 인생역정과 운영에 관련된 얘기를 들어봤다.
그는 78세임에도 건강한 60세초로의 젊은 기개를 가지고 힘찬 악수로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북한난민으로서 북한이탈주민지원 이끌어
먼저 김 이사장에게 이 재단의 성격과 운영요강을 물었다. “우리재단은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종전 북한이탈주민후원회를 이명박 정부들어 확대 개편 설립된 통일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이사장은 전 장관에 준하는 예우를 받고 있습니다.”라면서 이 재단은 이탈주민들이 체재와 생활환경이 다른 남한사회에 와서 빠르게 동화되고 안정적인 정착을 뒷받침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태어나 17세 1·4후퇴시 혈혈단신 강원도 묵호로 피난해 온 북한난민이다. 그후 그는 파란만장한 정착과정을 거쳐 경기 안양시에서 15대 국회의원으로 당선, 외교통일분과위원을 역임할 기회를 가졌다. 이후 전 정동영 통일부장관과 여러 동료의원의 천거를 받아 2005년 이 재단의 전신인 북한이탈주민후원회장을 거쳐 재단이사장을 맡았다.
그는 2005년 북한이탈주민후원회장 취임시 직원 5명, 예산 3억7천만원이던 것을 지금 재단직원 46명, 연 예산 247억원으로 늘렸다.

남북통일 빠르게 다가올 것으로 생각
김일주 이사장은 통일이 빠르게 다가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조기통일전망을 이렇게 풀이해 줬다.
“첫째, 지금의 북한 식량사정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굶어죽는 사람이 95~96년 당시보다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북한 가뭄도 심각한데다 식량배급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그런데다가 북한 시장마당이 개설 운영되고 있어 남한에서 흘러들어가는 정보가 빠르게 전파되어 자유통일의 갈망의식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둘째, 중국인구 14억중 6억인구는 아프리카빈민층에 준하는 소득취약 경제적 약자입니다. 7천~8천만명은 서구 부국의 부자보다 훨씬 많은 고소득자로서 빈부 양극화현상이 하늘과 땅차이 입니다. 중국 시장경제는 발전되고 있지만 양극화 해소, 정치후진이 심각합니다. 관료부패와 티베트, 신강, 위구르족의 민심동요 유혈사태 수습상 북한주민대상 식량지원이 힘듭니다. 중국은 북한과 시리아 등 독재정권에 대한 광범위한 국제적 지탄여론의 팽배로 북한의 3대세습 보장을 담보 못할 뿐더러 식량지원도 못할 처지에 있습니다.”

통일대비 북한주민 돌보기에 조바심
김 이사장은 통일이 되면 북한주민 돌봐줘야 할 과제가 많아질 것에 대비,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면서 조바심을 보였다. 김 이사장은 지원재단의 활동과 관련, “우리 재단은 마치 조그마한 부처가 움직이는 모습으로 24시간 콜센터를 운영하는데 다급한 민원을 비롯 이탈주민의 취업, 창업, 직업훈련 등 지원에 힘쓰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17세 혈혈단신 피난…파란만장한 인생살이
그는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UN군의 함경남도 단천 함락 당시 17세 어린나이인 50년 11월 국군3사단에 현지 입대했다. 중공군이 개입한 12월 말 흥남철수시 강원도 묵호항 상륙후 동부전선에 참전했다. 그후 51년 이승만 대통령의 학도병출신자의 복교(復校)특명으로 군생활 1년만에 제대, 천안삼거리 인근 방죽마을에서 그는 쌀 7가마를 받기로 하고 머슴살이를 했다. 그러나 주인은 그에게 쌀 8말만을 내주었다.
그는 이때 울분을 새기며 농촌의 문맹(文盲)약자를 돕기 위한 농민교육운동을 하기로 다짐한다. 우선 북으로 귀향, 부모를 만난 뒤 농민계몽을 다짐한 그는 부모를 만나기 위한 방편으로 북파간첩단인 8240켈로부대에 지원하고자 한강을 도강(渡江)하려다 미군초병에게 체포된다.
초소에 끌려간 김 이사장은 미군장교에게 메고 있던 배낭검사를 받는다. 이때 배낭 윗쪽에 넣었던 에이브러험 링컨 대통령의 전기(傳記)를 본 미군장교가 통역을 불러와 김 이사장의 신원을 확인한다. 김 이사장이 이때 미군장교에게, 앞으로 해야 할 농민교육 포부를 밝히자 미군장교는 켈로부대 입대를 만류하며 대학진학을 종용했다.
이 조언에 따라 김 이사장은 남한에 남아 모나리자다방 아르바이트, 청소부, 택시기사 등 잡일을 하며 20세 때 휘문고교 2학년에 편입했다.

59년 국내 최초 농민교육원 운영…새마을운동에 점화
곧이어 그는 고향 단천군 윗동네 분이었던 건국대 설립자 유석창 총장을 만나 건국대 장학금을 받고 입학, 총학생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천안 머슴살이 때 다짐했던 농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휘문고 재학시 전국 3600개소에 마을문고 보급을 시작했다.
“교동·제동·계동초교 학생들 한테서 모은 헌책을 밤새 다림질을 해 펴낸 뒤 마을문고에 보냈습니다. 봄에 배부해 준 책이 가을에 가면 담배권련 마는 휴지 또는 변소 휴지로 쓰이고 남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문고를 보급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59년 한국농촌문화연구원을 설립, 농민교육원을 운영한다. 이는 지금의 가나안농군학교보다 3~4년 일찍 농민교육도장을 일으킨 것이다.
1969년, MBC가 관심을 가지고 ‘농촌혁명아 김일주’라는 다큐멘터리 프로를 찍어 방영했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이 이 다큐를 보고 그가 이끈 농민운동을 전국민에게 보급시키게 된다. 그렇게 그는 새마을운동을 점화시킨 장본인이 된 것이다.
그는 또 2009년 일본의 ‘마쓰시타정경숙’을 본떠 만든 지도자교육기관을 만들어 현재까지 운영해 오고 있다.

이태리유학때 브란트 총리 만나 통일의지 더욱 키워
한편 김이사장은 66년부터 67년까지 이태리 유학기간 중 스위스를 방문해 스위스가 영세중립국인데도 국방예산이 물경 몇조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국가안보와 호국의지를 깊게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 준전시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국방예산이 5,000억~9,000억원에 불과했다.
그리고 당시 베를린시장이었던 브란트총리를 만나 4시간여에 걸친 브란트총리의 유태인학살 사죄표명 의지와 통일에 대한 강열한 애국담론(愛國談論)을 감명깊게 들었다고 한다. 그는 15대국회의원으로 등원(登院)한 뒤, 이때 배운 호국의지와 통일담론을 원용(援用)하며 의정활동에 힘써 온 것이 오늘의 북한이탈주민돕기의 열정을 가다듬는 또다른 계기가 되었노라고 고백했다.
끝으로 그는 학교 폭력사태를 학교Police(경찰)제도로 풀려고 하는데, 이는 황당한 발상이라고 했다. 애국과 역사교육을 강화하면 풀린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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