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심으로 목불상(木佛像) 빚는 ‘불모(佛母)’ 허길량 목조각장

 

‘불모(佛母)’는 마음 안에 있는 불성(佛性)을
 밖으로 드러내어 불상을 빚는 장인(匠人)

 오대산 상원사 ‘500문수보살 500문수동자’
 목각탱, 평생의 보람과 자부로 남아

소년은 늘 배가 고팠다. 대물림처럼 이어져 내려온 가난은 전라도땅 승주의 산골소년을 회충약 산토닌을 먹은 날처럼 밤낮으로 어찔어찔 현기증에 시달리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작심한 듯 소년의 손목을 대차게 힘주어 잡아끌고 쓰다 달단 말 한마디 없이 훠이훠이 앞서서 선암사 무지개다리(승선교)를 건넜다. 처음엔 영문을 몰랐지만, 어머니께서는 입이라도 하나 덜 양으로 아들을 절에 맡기기로 한 것이었다. 그렇게 소년은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흡사 주어진 운명처럼 절, 그리고 부처님과 인연을 맺게 됐다. 훗날, 마음 안의 불성(佛性)을 밖으로 드러내어 불상을 빚는다 하여 붙여진 ‘불모(佛母)’가 된 목조각장 허길량(60)은, “그땐 흡사 안개속 미로를 헤매는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았던 아뜩한 세월이었다”고 회고했다.

<장인 전수교육은 철저한 도제식(徒弟式)수업이라야 한다고 허 장인은 말한다.>

# 불교미술과의 인연, 그리고 명예얻다
학업을 위해 절에서 나온 그는 순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그리고 을지로의 한 목공예사 문을 두드렸다. 절에 있을 적에 손재주 하나만은 인정받은 터라 ‘밥과 잠자리만 주면 열심히 기술을 배워보겠노라’간청해 그날로 일자리를 얻고, 찬 마룻바닥에서 새우잠을 자며 목공예기술을 착실하게 익혀나갔다.
-어떻게 불상조각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요. 공예사의 일이란 것이 허섭스레기와도 같은 잡일이 많았을텐데…
“어느 날 한 절에서 범종의 나무틀 장식으로 비천상(飛天像)을 조각해 달라는 주문이 들어왔어요. 몇날 밤을 새워가며 정성껏 조각을 했는데, 주문한 물건을 찾으러 온 의뢰인이 그 비천상 조각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솜씨가 아까우니 불교미술을 하는 좋은 분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셨어요. 그때 소개받은 분이 당대 불화(佛畵)의 대가였던 이인호 선생님이었습니다.”
이인호 선생과의 만남을 계기로 그는 본격적으로 불교미술에 입문하게 된다. 그는 곧바로 이인호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불화초본(佛畵草本)부터 착실하게 불화의 기본기법을 익혀나갔다. 물론 그러는 중에도 조각칼을 놓지 않았다. 어느 정도 초본기법을 익힌 후에 따로 작업실을 차려 나갔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으니 서울 변두리를 전전하며 공방(工房)을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일생일대의 대전환기가 마련된 건 그가 스물다섯살 나던 해인 1977년. 스승 이인호 선생이 내어준 초본을 바탕으로 해서 부조(浮彫)로 새겨낸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세음보살상’(가로3m60㎝×세로3m60㎝)이 불교미술대전에서 당당히 대상을 수상하기에 이른 것이다.
정말로 다 버리고 싶을 정도로 살기 힘들어도 배움의 의지를 결코 버리지 않았던 그의 각고의 노력이 빛을 얻어 비로소 목조각 장인으로서의 명성을 얻는 순간이었다.
-요새말로 ‘대박’을 터뜨렸으니 그야말로 돈과 명예가 넝쿨째 굴러들어온 셈이었겠군요.
“유혹도 많고 주문도 많이 들어왔지만 터무니 없는 욕심으로 망가지는 건 잠깐이란 생각이 들어 자제해 가며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어요. 제 작품에 대한 애착도 있었고…”

“마음이 반듯해야 불상도 반듯해져”
-석운(石雲)이라는 법명을 얻은 인연도 남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와 같이 제 뒤를 살펴주시고, 조선 중기 금호스님을 시작으로 보응→일섭→우일스님으로 이어지는 계룡산 화파 불교미술의 정통계보를 잇게끔 우리나라 근세 불교미술의 대가인 우일스님의 문도(門徒)로 삼게 해주신 덕암스님(전 태고종 종정)이 제겐 속가의 아버지 이상으로 큰 어른이셨습니다. 그 어른이 석운이라는 법명을 지어주셨고, 심지어는 각절의 부처님 조성 작품 주문도 받아주시기도 했어요.”
-덕암스님께서는 허 장인의 신심을 보신 것 같은데, 우일스님께선 어떤 가르침을 주셨나요?
“부처님을 조성하는 것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늘 말씀하셨어요. 자세가 반듯해야 부처님 조상도 반듯해 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불상은 보는 것이 아니고 읽어야만 하는 것이라고요.”
-제대로 목불상을 조성하려면 나무가 무엇보다 중요할 것 같은데요. 어떤 나무를 주재료로 쓰십니까? 재료 구하기가 어렵지는 않나요?
“주로 우리 토종 소나무인 적송(赤松)을 씁니다. 옹이나 균열이 잘 나서 마름질을 잘 해야 하지만요. 그외에 부드러운 인상을 줘야 하는 불상 조성 때는 은행나무를 씁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를 만나는 것도 소중한 인연인데, 요즘에 그 분야에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판매상이 있어 나무재료 조달에는 그닥 어려움은 없습니다. 나무에서부터 여러 작업을 거쳐 짧게는 2개월, 길게는 6개월에 걸친 불상 조성작업은 한 과정 한 과정이 성스러운 의식이나 다름 없어요. 자비롭고 아름다운 성상(聖像;부처님)은 그렇게 탄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작품 중에서 유독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나요?
“그동안 전국 200여개 사찰의 불상을 조성했습니다만,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보궁이 있는 오대산 상원사 중대사자암 500문수보살과 500문수동자 목각탱(2006)은 평생의 보람과 자부로 남을 만하고, 불경속 보살들의 형상을 목각으로 유형화 해 첫번째 개인전(2002)을 열었던 33관음, 두번째 개인전 때 선보인 33비천상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후진양성이라든가, 기념관을 건립한다든가 하는 일들이 있을 텐데요.
“목불상 조각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르기까지는 그야말로 오랜동안 피땀 어린 각고의 노력이 필요해서 선뜻 권하기가 쉽지 않네요. 그래도 제 문하에서 경기무형문화재(한봉석)와 전북무형문화재(임성안) 목조각장이 둘씩이나 나왔으니 뿌듯 합니다. 기념관요…? 부처님 뜻이라면 머잖아 이루어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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