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특별 초대석 효녀가수 이효정 씨

치매 걸린 노모 26년째 병수발하며 가수활동 이어가

6남매 힘들게 길러온 병든 노모위해 가수 데뷔
구구절절 애틋한 노랫말로 대중의 심금 울려

♬♪긴 머리 빗어내려 동백기름 바르시고 분단장 곱게 하고 내손잡고 걸으실 때 마을 어귀 훤했었네. 우리 어머니 여섯 남매 자식걱정 밤잠을 못 이루고 칠십 평생 가시밭길 살아 오셨네. 천만년 사시는 줄 알았었는데 떠나실 날 그다지도 멀지 않아서 막내딸은 울었답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노래를 하며 딸은 가슴으로 운다. 그렇게 총명하시고 고우시던 어머니는 어느 날 어린아이가 되어 딸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가 되어버리셨다. 26년째 막내딸의 손을 놓지 못하고, 그저 딸아이가 불러주는 노래에 행복한 미소만 짓는 어머니는 오늘도 그렇게 하루하루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머니, 막내딸은 오늘도
  노래하며 가슴으로 웁니다”

“엄마, 오늘 기분은 어떠세요.” “……” 어머니는 말이 없다. 간신히 의자에 앉아 그저 힘없는 손으로 딸의 머리를 매만진다. 딸의 이름은 이효정. 칠갑산의 작곡가가 효심 깊은 그녀에게 지어준 예명이다. 트로트 가수인 이효정씨는 26년째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효녀가수’라 부른다.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애정과 효심을 담아 직접 쓰고 부른 ‘우리 어머니’란 노래는 그녀에게 어머니란 존재가 얼마나 큰지를 느끼게 해준다.
젊은 시절 그녀의 어머니 김랑구(92)씨는 노래가사처럼 ‘긴 머리 빗어내려 동백기름 바르시고 분단장 곱게 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건강하던 두 오빠가 갑자기 정신질환을 앓으면서 불행은 시작되었다. 두 오빠의 병수발을 위해 어머니는 늘 절을 찾아 백일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그 공덕에도 불구하고 두 오빠는 20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잇달아 아버지도 병환을 얻자 그 병수발은 고스란히 어머니의 몫이 됐다. 두 아들과 남편을 한꺼번에 잃은 어머니는 그길로 생전에 오빠를 돌봐주던 절에 공양주 보살로 입산해 버렸다. 하지만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한테 또 한번의 큰 시련이 찾아왔다. 어머니는 화장실 변기에다 빨래를 빨고 있었고, 그때 효정씨는 어머니가 치매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알츠하이머 병 치매로 신경세포들이 죽으면서 기억력이 감퇴되고 있었다. 소변도 보지 않으면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화장실을 가자고 했고, 가족들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결국 막내딸인 그녀가 모든 짐을 져야했다. 유동식으로 만든 식사와 목욕, 배변수발 등을 모두 해냈다.

노래는 어머니와 나의 ‘삶의 원동력’
19년 전 그녀는 잠깐이라도 제 정신이 돌아오는 어머니를 위해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그것이 노래였다. 어려서부터 노래 잘한다고 칭찬했던 어머니에게 딸이 가수가 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1994년 데뷔곡 ‘새벽달’을 시작으로 ‘사랑의 조약돌’ ‘서천 아가씨’ ‘우리 어머니’ ‘농부의 아내’ ‘송두리째’ ‘가지 말아요’ 등 지금까지 8장의 앨범을 내고 인기 트로트 가수의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병간호로 외부에서 1박 조차 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꾸준한 방송생활은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효심 깊은 그녀의 사연이 방송을 통해 전해지면서 1997년 발표한 ‘우리 어머니’가 4년이 흐른 후 인기를 끌게 되었던 것. 가녀리게 꺾이는 끼 많은 보이스에다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애정과 극진한 효심이 우러나오는 노래가사에 감동한 팬들이 늘어났다. 이어 2003년 어머니를 모시며 밝게 사는 이효정 씨의 이야기가 KBS 2TV ‘인간극장’으로 방영된 후에는 잔잔한 감동의 글이 시청자 게시판을 가득 메우면서 그녀의 인기는 높아져 갔다. “항상 부모에게 바라기만 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는 글들이었다. 공식 팬 카페도 생겼다.
2005년엔 이 씨 자신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해있으면서도 어머니를 돌볼 사람이 없어 같이 입원한 채로 어머니를 간호하기도 했다. “2005년과 2006년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제가 더 병에 걸릴 정도였는데, 다행히 어머님이 회복하고 나서 일시 중단했던 가수활동을 다시 시작했어요. 생전에 딸이 가수활동을 하는 모습을 더 보여드리는 것이 효도라는 깨달음이 들었거든요.” 그녀의 효행담이 퍼지면서 2006년 한국연예협회 주관 제6회 예술인 스승님 추대식에서 효녀상을 수상했다.
어머니의 병수발로 힘든 나날을 보내지만 그래도 힘든 마음이 한 순간 풀릴 때가 있단다. 바로 어머니가 잠깐씩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다. 그 순간에는 지난 고생이 눈 녹듯이 사라진단다. “완쾌를 바라지 않아요. 이보다 더하지 말고 이 상태를 유지하셔서 정말 제 곁에 오래오래 머물러 주셨으면 하는 게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바람이죠”
그녀는 얼마 전 어머니가 가장 많은 세월을 보냈던 남한산성 줄기에 타계 후 어머니 모실 공간을 마련했다. 그녀는 그곳에 어머니를 위한 노래비도 세울 것이라며, 자신이 직접 작사한 ‘우리 어머니’의 노래가사를 나지막이 읊조렸다. “… 천만년 사시는 줄 알았는데. 떠나실 날 그다지도 멀지 않아서 막내딸은 울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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