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새 왕은 아직 나이가 어리고, 전 왕비는 늙어 식견이 없으며, 외척 풍양 조씨들에게 국정을 전담하게 하면 반드시 지난날처럼 될까 두렵다. 나라 정사가 가장 시급하니 대원군을 모셔 국정운영을 도모하게 하라.”
열두 살 어린나이에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이명복이 조선왕조의 대통을 이어 고종으로 등극하자 조정에서 내린 전지(傳旨)다. 곧 대원군의 섭정을 공표한 것이니, 이로써 지난날 흡사 초상집 개꼴로 파락호(破落戶)처럼 권문세가(權門勢家) 언저리를 기웃거리던 대원군이 조정의 전권을 장악하고 물경 10년간 천하를 호령하게 된다.
그야말로 천운이 열린 대원군에게는 가마 탄 채로 대궐에 출입하는 것이 허락되었고, 그의 사저인 운현궁과 창덕궁을 연결하는 전용 비밀통로가 만들어졌다. 맘 먹은 대로 천하에 못할 일이 없는 최고 실세가 되자 운현궁 안팎 솟을대문 앞은 어깨가 서로 부딪힐 정도로 사람들이 들끓고, 마차 수레바퀴 맞부딪치는 소리가 종일토록 요란하게 하늘에 닿았다.
그런 대원군이 실정(失政)으로 실각-재집권을 거듭하다 결국에는 앙앙불락(怏怏不樂)하던 며느리 민비 일파에게 권부에서 밀려나 하릴없이 늙고 지친 몸을 의탁하고 지내던 마포 공덕리 석파산장(아소정)에서 1898년 2월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실로 뜬구름 같은 권력무상이 아닐 수 없다.
그로부터 고작 백 십여년 지난 요즘 우리사회는 권력을 좇는 ‘철새’무리들의 이합집산으로 해가 뜨고 날이 저문다. 얼마전엔 여당의 비상대책위원회가 금배지에 따라붙는 특권을 개혁차원에서 내려놓기 위해 마련했다는 희한한(?) ‘대국민 약속’ 발표방안을 검토중이라 하여 구구하게 말이 많다. 그 ‘대국민 약속’이라는 제목의 문건 내용은 대략 이렇다.-△반말하지 않겠습니다 △골프를 하지 않겠습니다 △비행기(비즈니스석 제공) 이코노미석을 타겠습니다 △열차요금(KTX열차 이용 등 요금 450여만원 지원) 추가부담을 코레일에 넘기지 않겠습니다 △가족 및 친인척을 보좌진으로 임용하지 않겠습니다 △잘못이 발생했을 때는 보좌관과 연대책임을 지겠습니다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겠습니다 △폭력을 쓰지 않겠습니다… △위 약속을 세 번 이상 지키지 않을 시에는 4월의 19대 총선에 불출마 하겠습니다.
그에 앞서 ‘먹튀’식의 불체포특권 포기, 밤낮 몸날리기 몸싸움으로 일관하면서도 세비를 챙기는 부끄러움을 의식한 무노동 무임금 원칙 도입 방안을 내놓기도 했지만, 그 내용이 참으로 코미디 수준이다. 여지껏 그래왔던 짓, 그 권력의 맛을 과연 쉽게 내려놓을 수 있을까. 흡사 불량청소년의 ‘고해성사’같은 그 ‘대국민 약속’은 말 없이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인 것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리 수선떠는 것을 보니, 아직도 ‘맛’만 알았지 ‘멋’과 ‘격’은 한참 멀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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