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십승지지(十勝之地)’란 우리나라 안에서 굶주림과 병란(兵亂)의 염려가 없어 피란하기에 좋은 곳 열 곳을 말한다. 이 말은 조선 중기때 학자로서 풍수·역학·천문·관상법에 도통해 이른바 ‘족집게 도사’로 통했다는 술사(術士) 남사고(南師古)가 <십승기(十勝記)>를 기록해 펴내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남사고가 가려 뽑은 ‘십승지’는 충청도 공주의 유구와 마곡, 전라도 무주의 무풍동, 충청도 보은의 속리산, 전라도 부안의 변산, 경상도 성주의 만수동(萬壽洞), 봉화의 춘양면(春陽面), 예천의 금당곡(金唐谷), 강원도 영월의 정동(正東) 상류, 전라도 운봉의 두류산(頭流山), 경상도 풍기의 금계촌(金鷄村)이다.
이곳들을 찾아 훗날 지리학자인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이 자신의 환갑 이듬해인 1751년경 지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이 지역들의 풍수지리를 거론하며 남사고의 ‘십승론’을 크게 부각시켰다.
이들 열 곳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풍광이 밝고 수려하며 물이 많고 땅이 비옥해 사람이 살기엔 더없이 좋은 ‘복지(福地)’라는 것이다. 공주의 유구와 마곡은 ‘골짜기엔 시냇물이 많고 논이 비옥하다. 또 목화·기장·조를 경작하기에 알맞아서 흉·풍년을 알지 못할 정도로 여유있게 살 수 있어 유랑하거나 이사할 근심이 적으니, 이만하면 낙원이고 알맞은 피란처다’라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부안의 변산은 ‘땅도 비옥하고 호수와 산의 경치가 좋다. 이중에서 장기( 풍토병)  없는 샘물만 택한다면 살 만한 곳이다’하였다. 성주의 만수동은 ‘산천이 수려해 이름난 선비와 인재들이 많이 나왔다’고 했으며, 봉화의 춘양면은 ‘깊은 두메산골이지만 관동바닷가에서 생산되는 물고기와 소금이 이 마을을 거치므로 경제적 이익이 있고 은둔해서 살 만한 곳’이라고 했다. 예천의 금당곡은 ‘이백(二白, 태백산과 소백산)의 남쪽으로 신이 계시한 복된 땅이며 그 기색이 한양과 같다’, 풍기의 금계촌은 ‘영·호남에 끼여 있는 최상의 복지(福地)’, 운봉의 두류산은 ‘골이 서리서리 깊고 큰 부산(富山, 부자산)’이라고 했다.
얼마 전 부산의 한 의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주거환경으로 삶의 질을 평가하면서 우리나라의 광역시 이상 7대 도시 가운데 울산이 가장 살기 좋고, 부산이 가장 살기 나쁘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 분석평가의 기준이 안정된 일자리와 고용률·실업률이었다니, 저때의 ‘십승지지’와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이 든다. ‘나물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지 아니한가’하며 안분자족(安分自足)하던 저때 선인들의 얘기를 두고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할 것 같아 마음이 시리다. 지금의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이고 얻은 것은 무엇인가….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