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진 남진농기 대표

 

증폭전화기·백합조개 양식사업, 관권 횡포로 잃어
매출 1천만불 완구사업 사기 당한 후 농기업으로 재기

개량물꼬, 논둑보강덮개, 육묘기, 발아출아기, 건조기, 육모상자, 흙톨볍씨 등의 농기자재를 생산하고 있는 (주)남진농기 유남진 대표. 남진농기는 76세의 고령인 그에게 네 번째 사업이다.
한 때 1천300여명의 직원과 수출 1억불을 목전에 두며 종합상사 진입의 꿈을 키우던 전동완구 제조업체(남진완구)를 운영했지만 사기를 당해 문을 닫았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재기해 농기자재 제조사업에 도전했다.
매출 100억 원의 장밋빛 꿈을 키워가고 있는 유 대표가 세 차례의 참혹한 실패 뒤에도 거뜬히 재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치열한 발명의 열정, 뜨거운 삶의 의욕이었다. 유 사장의 파란만장하고 굴곡진 인생사가 우리 삶에 귀중한 활력을 줄 것으로 기대하며 조심스레 귀를 기울였다.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좌교리에 위치한 (주)남진농기. 마치 항공기 격납고 같은 커다란 공장건물과 비교되는 작은 컨테이너 박스. 그곳이 유남진 대표의 사무실이다.
“강릉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기계를 만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발명에 대한 특기는 그때부터 있었던 것 같아요. 1962년 처음 발명을 시작해 49년이 흐른 지금까지 발명인의 삶을 살아온 셈이죠. 1984년에는 수출 1천만불을 달성해 동탑산업훈장을 받았어요. 발명특기와 업적을 인정받은 것이죠.”
그는 1962년 군 제대 후 증폭(增幅)전화기를 개발했다. 당시 시중 판매되던 K사의 전화기(체신1호)는 선로와 통신설비가 나빠 잡음이 많고 소리가 작아 통화음질이 형편없었다.
당시 유 대표는 서울 쌍림동에 직원 3명을 두고 5천만원의 전 재산을 털어 발명에 몰두했다. 3년 후 그는 증폭전화기를 개발해 특허를 받아냈다.
“볼륨을 키우는 게 아니고 전화기를 들면 소리가 크고 음질이 좋은 착상식(着床式) 증폭전화기를 개발해 특허를 받은 것이죠. 전국에 대리점을 모집했는데, 폭주하는 주문량을 맞추지 못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죠.”
전화기사업이 3년차에 접어들 무렵 체신부 측에서 느닷없이 유 대표가 개발한 증폭전화기의 생산중단을 요구하며 판매제동을 걸어왔다. 체신부의 이 같은 처사를 수긍하기 힘들었던 그는 2년 후 자신이 개발한 증폭전화기를 모방한 일본제품이 수입돼 판매되는 것을 보며 자신의 전화기가 왜 생산중단 됐는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당시 관권(官權)의 횡포와 비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었다고 유 대표는 말한다.
그 후 유 대표는 1967년 수산청이 주관해 모집한 백합조개 양식업자로 선발돼 일본 오키나와에서 1개월의 연수교육을 받고 조개양식업에 뛰어들었다. 이것이 유 대표의 두 번째 사업이다.
조개양식은 10㎜의 종패를 갯벌에 뿌려 2년 반 만에 직경 4~5㎝로 키워 일본으로 전량 수출하는 조건이었는데, 투자대비 60배 이상의 고소득이 보장되는 유망사업이었다.
수산청 측의 3천만 원 무담보 사업보조로 경기도 화성에 8만평, 인천 송도 4만평, 강화에 2만평의 갯벌에 양식허가를 받아 종패양식에 들어갔다. 양식이 성공적으로 이뤄져 2년 후 첫 수확에서는 1만불 수출의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갯벌 인근의 주민들은 반년만 기다리면 20만원 받을 조개를 탐내 이를 몰래 캐다가 국내에서 1되박에 200원의 헐값을 내다팔았다. 나중에는 경비원의 만류와 제지도 소용없었다. 당시 유 대표는 주민들의 조개채취를 제지하다 머리를 다쳐 두 달간 입원하기도 했다.
“당연히 경찰에 신고했지요. 그러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경찰 측은 조개를 캐간 사람들이 대부분 안면이 있는 지역민이라 자연산을 채취해 팔았다는 그들의 얘기만 듣고 무혐의로 방면해줬어요.”
조개양식업의 성공을 목전에 두고 또 다시 관권(官權)의 방조로 두 번째 사업도 접어야 했다.
실의에 빠져 방황할 때 호주에 이민 가서 살던 고등학교 2년 후배가 유 대표를 찾아왔다. 후배는 유 대표를 위로하며 발명특기와 솜씨를 살려 호주를 대표하는 동물인 코알라를 완구로 제작해 볼 것을 제의했다. 그는 후배의 제의를 받아들여 완구제작에 뛰어들었다.
“완구사업은 1971년에 시작했는데 당시엔 수중에 돈이 없었어요. 아내가 친구들로부터 12만원을 구해왔어요. 이중 10만원으로 서울 성북구 송월동에 지하 30평의 공장을 차리고 완구를 제작하기 시작했어요.”
토끼털과 딸의 점퍼 내피(內皮)를 뜯어 앙증맞은 코알라 인형 샘플을 만들었다. 그는 이 샘플을 들고 호주로 날아갔고, 호주에 간지 4개월 만에 6천개(3천달러어치)의 주문을 받았다.
그는 발명특기를 살려 완구의 배안에 집게를 넣어 옷에 매달 수 있는 완구를 개발했고, 이 제품은 세계완구시장에서 대히트를 쳤다.
이어서 목이 돌아가고 팔다리가 움직이는 전자완구를 개발해 미국과 일본의 특허를 얻었다. 전동완구 특허취득 후 회사 생산능력인 30만~40만불을 넘는 80만~100만불의 주문이 밀려와 수출을 반려하는 호황을 거쳐 남진완구는 직원 1천300여명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때 유 대표는 500여평 규모의 국내 최고의 기숙사를 지었고, 15~16세 여성직원의 야간 고교 진학을 도와 6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등 직원복지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남진완구의 연매출은 900만불. 유 대표는 쇄도하는 주문량을 감안하면 머지않아 1억불 수출의 종합상사로 진입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사업에 몰두했다.
그는 1억불 매출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하와이로 갔다. 이때 단골고객인 일본계 미국인의 안내로 하와이 완구시장을 돌다가 움직일 때마다 5색 빛이 나는 훌라후프의 개발을 착안하고, 이를 발명해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유 대표는 개발한 훌라후프 제품을 가지고 다시 하와이에 갔다가 한국계 미국인의 사기에 휘말려 외상으로 내준 막대한 제품값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그 사기꾼이 유 대표의 특허를 홍콩업자에게 팔아넘겨 특허권을 찾기 위한 6년간의 법정투쟁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사기를 당해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4천억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을 손실 입은 타격으로 그는 완구제조에서 손을 떼야 했다.
완구사업을 하는 내내 유 대표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던 미국의 거대완구회사 관계자가 한국에 직접 와서 유 대표의 재기 지원을 약속했지만 그는 정중히 사양했다.
“당시에는 실의가 너무 커…”
순간 인터뷰 내내 담담해하던 유 사장의 눈이 붉게 충혈되며 눈물이 흘렀다.
한때 경기도 일원 4곳에 있던 완구공장의 문을 모두 닫고, 1992년 충북 충주에 있던 공장에서 군인을 동원해 모내기를 하다가 영감을 얻어 18시간이 지나면 싹이 트는 직파용 흙톨볍씨를 개발해냈다.
흙톨볍씨가 전 세계 벼농사 지대에 보급될 경우 연간 100억불, 나아가 1천억불 시장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완구업체를 운영할 때의 200여종 완구특허를 비롯해 지금 농기업을 운영하면서 135개의 특허개발안을 갖고 있어요.”라고 말하며 유 대표는 세밀하게 그려진 도면과 깨알 같은 글씨로 기록한 보물 같은 아이디어노트를 보여줬다.

완구제조 당시부터 지금까지 일기를 쓰고 있다는 유남진 대표. “사업으로 번 이익을 사회에 공헌하며 살겠다고 다짐하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생은 농업발전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유 대표는 우리 농업인들이 다문화가족을 잘 돌봐주기를 간곡히 당부했다. 계속 증가하고 있는 국내 거주 외국인들에게 온정의 손길을 베풀게 되면 그들 출신국과의 유대강화로 국력을 키우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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