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북소리 둥둥 울려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도 지려 하는구나/황천에는 주막 한 곳 없다는데/오늘 밤은 누구 집에서 묵어 갈고?’
(擊鼓催人命 回頭日欲斜 黃天無一店 今夜宿誰家)

이 시는 조선조 세조때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었던 만고의 충신 성삼문(成三問)이 새남터 형장에 끌려나와 죽기 직전에 읊은 절명시(絶命詩)다.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그토록 초연할 수 있음이 오히려 이 시를 대하는 이들을 더욱 처연하게 만든다.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사육신이란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 잡혀 처형당한 이들로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여섯명을 말한다.
1455년, 수양대군이 12세의 어린 조카 단종을 무력으로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왕위에 올라 세조(世祖)가 되자 이 비행에 의분을 참지 못한 뜻있는 충신과 선비들이 오직 ‘불사이군(不事二君,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의 곧은 일념으로 단종 복위를 모의했다.
그러나 함께 모의에 참여했던 김질이 돌연 마음을 바꿔 모의사실을 조정에 밀고해 17명의 모의자들이 붙잡혀 세조의 국문(왕이 친히 죄인을 심문하는 일) 끝에 머리·몸·팔·다리를 토막치는 극형인 능지처참에 처해진다. 이 대사건을 두고 후에 남효온(南孝溫)이 <추강집(秋江集)>에 ‘육신전(六臣傳)’을 지으면서 이 사건의 주모자였던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6인을 육신이라 하니 그 이래로 세상에서는 이들을 사육신이라 일컬어 왔던 것이다.
극형에 처해져 3일간 효수(민중을 경계하기 위해 죄인의 목을 높은 곳에 매달아 놓는 것)된 육신 중 4명의 시신을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한밤중에 떠메고 한강을 건너 노량나루 위 야산에 매장하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 조성된 묘는 성삼문·이개·박팽년·유응부 4명이었고, 그후 1978년 유성원·하위지·김문기의 가묘가 만들어져 지금 서울 동작구 노량진의 사육신공원 단종충신역사관에는 일곱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칠신(七臣)의 가묘가 조성돼 있다.
그런데 최근 사육신 후손들과 김문기 후손인 김녕 김씨들이 김문기의 사육신 포함 여부를 놓고 맞서 시끄럽다. 사육신수호회에서는 “1977년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자신의 조상인 김문기를 사육신에 억지로 끼워 넣은 것”이라 주장하고, 김문기 후손들은 “도진무 직책으로 군(軍) 동원의 책임을 맡았던 김문기도 당연히 육신에 들어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아무려나 후세들을 위해서도 이 해묵은 후손간의 싸움이 하루속히 정리돼 사육신공원이 바른 역사교육장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