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내 고향은 평택에서도 가장 서쪽, 아산만 포구의 거뭇한 수평선이 아득히 바라보이는 팽성읍 도두리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미8군이 이전해 가기로 되어 있어 농지의 대부분이 미군기지 부지로 수용된 곳이고, 그로해서 평생 오직 농토 만을 목숨처럼 신앙처럼 부둥켜 안고 순하디 순한 소처럼 살아온 주민의 대부분이 고향땅을 떠났다.
아산호 방조제가 막히기 전엔 하루 두 번 물때에 맞춰 서해 바닷물이 들락거렸고, 마을 뒤편까지 이어진 갯고랑을 따라 호랑나비 날개와 같은 황포돛배가 소리없이 밀려들어 왔다. 그래서 사방 천지가 끝간데 없이 넓어보이기만 했던 논 뿐인데도 마을에서는 늘 서풍에 묻어온 비릿한 갯내음이 났다.
마을은 3백호가 족히 넘는 비교적 큰 자연부락 이었지만, 야트막한 등성이 따비밭은 눈가 저 먼데 아득히 들어오는 정도고 온통 논 뿐이어서 보릿고개는 먼 남의 얘기인 줄로만 알고 자랐다. 문 밖을 나서면 신작로고 그 신작로는 자전거 한 대 겨우 다닐 수 있는 농로로 이어졌다. 그 농로를 따라 갯벌가까지 가는데 어린아이 걸음으로 한 시간 이상은 걸렸던 것 같아 누가 물으면 그냥 먼 거리라는 뜻으로 ‘10리길’이라고 허풍떨며 둘러대곤 했다.
실제로 절대경작농지 규모가 평택에서는 제일 컸던 평택쌀의 주산지였으니 어렸을 땐 교과서에서만 배웠던 김제·만경평야가 ‘우리동네 뜰 만 할까…?’하고 갸우뚱거리기도 했다.
논에 허옇게 들어찬 봄물이 찰랑거리며 어찔어찔 현기증을 일으키게 했던 봄, 풀 독에 훅훅 달아오른 몸을 갯벌 멱감기로 식히며 천렵을 즐기던 여름, 오리가 넘는 학교 가는 논둑길을 내달릴 때마다 후두둑 쏴-하니 일제히 날아올라 얼굴에 따끔따끔 와 부딪히던 메뚜기를 강아지풀에 잡아꿰어 솔가지불에 구워먹던 가을… 모두가 나름의 독특한 재미가 있었지만, 마을 조무래기들이 더욱 신나했던 건 겨울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논에 물을 가득 가둬놓아야만 이듬해 봄에 농사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물이 경계도 없이 하얗게 얼어버리면 당시의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보다 몇십 몇백배나 큰 얼음판이 저절로 만들어졌다. 철사줄로 얽어 맨 썰매를 타고 얼음판 일주길에 오르면 노루꼬리만한 짧은 겨울 해는 어느 새 아산만에 절반쯤 벌건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때쯤이면 저녁밥을 지어놓고 아이들을 찾아나선 엄마들의 아이들 이름 부르는 소리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얼음판에 뒤섞여 언 채로 굴러다녔다. 서리내린 지붕위로 무수한 별이 차갑게 쏟아지는 밤에는 얼음판이 트고, 갈라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쩌엉 쩌엉- 문창호지를 뒤흔들었다.
그때 고향의 봄물 얼음판에서 썰매를 타던 촌아이가 이제는 노년에 들어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소식에 환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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