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스물넷의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 (思悼世子) 대신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조선의 22대 왕으로 등극한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는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돌연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의 이장을 결행했다. 차마 입에 올리지도 못할 억울한 참화로 죽은 아버지의 무덤을 서울 외곽에서 당대 최고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던 수원고을의 화산(花山)으로 옮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자리하고 있던 수원고을은 북쪽으로 5km정도 떨어진 팔달산 아래로 옮긴다는 이 엄청난 이주계획은 사업결정 두 달 만에 전격적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사도세자의 무덤이 옮겨지고, 가재도구를 이고 진 수원고을의 2000여 백성들은 팔달산 아래 새 거주지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이들에게는 국가에서 최대한의 경제적 지원을 해줘 다른지역 백성들도 하나 둘씩 팔달산 아래로 이주해 왔다.
공사기간 2년8개월, 공사투입인원 연 70만명, 총 공사비 80만냥….
그리하여 제법 규모를 갖춘 뉴타운, 즉 ‘화성(華城)’으로 명명된 신도시가 인위적으로 탄생하게 된다. 정조는 서울의 길목인 이곳에 전국의 유능한 상인을 유치해 경제 활성화를 꾀하는 한편 31세의 청년 신진학자 다산 정약용으로 하여금 신도시 화성을 둘러싸는 성곽을 쌓게 하고, 왕의 친위부대 등으로 방어기능을 수행케 해 서울 남쪽에서 가장 부강하고 진보된 왕의 배후도시로 키우고자 했다. 그것은 곧 정조가 꿈꾸던 이상국가이기도 했다.
성곽이 완공되기 1년 반 전인 1795년 2월, 이곳 화성에서는 아주 특별한 국가적 행사가 한이레간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의 미움을 사 뒤주에 갖혀 굶어죽는 모습을 보고 자라 유난히도 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가 그 어머니의 회갑연을 베푼 것이다. 젊은시절 남편을 끔찍한 참화로 여의고 한 많은 외로움에 떨며 세월을 보내다 장성한 아들이 왕이 되어 자신의 회갑연을 특별히 남편이 묻힌 화성에서 열어주다니… 혜경궁 홍씨는 복받치는 설움에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한다.
정조가 하마 제 꿈을 펴보지 못하고 돌연사 한 지 210여년 뒤의 서울은 지금 뉴타운이 애물이 되어가고 있다. ‘담 있는 집에 살아보는 게 어린시절 꿈이었다’는 판자촌 출신 서울시장이 그리는 서민없는 뉴타운,  쟁쟁한 거물들을 무너뜨리고 신진 무명인사들을 스물여덟명이나 여의도에 입성시켜 ‘(뉴)타운돌이’라는 풍자속어를 낳게 한 그 뉴타운이 이제는 지켜지지 못할 공약남발과 공사지연으로 지자체 국민혈세를 잡아먹는 공룡이 되어 있으니… 가슴 맑고 눈 맑았던 정조대왕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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