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김석조 명예기자]

농촌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많은 사람의 염려를 뒤로 한 채 마음의 고향인 농촌으로 시집을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직접 뛰어든 나의 농촌은 한발 물러서서 바라만 보았던 낭만의 그곳이 아니란 걸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힘들고 지친 생활에서 회의감을 갖기도 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탐스런 열매들을 보며 한순간 모든 시름을 놓아버리고 행복함으로 충만할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농사일보다도 가장 소중한 숙제는 두 살 터울의 아들 녀석을 키우는 일이었다. 농사일도 벅찬 어설픈 새댁이 하기에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찌 그리 했을까 싶다. 아이들이 어리다고 ‘집에서 마냥 애들만 돌보고 있으라’하지 않는 곳이 우리네 농촌의 실정이다.

큰놈이 다섯 살, 작은 놈이 세 살이 되던 해 소낙비가 지나간 후 햇살 따라 함께 하우스포도밭 손질에 나섰다. 남편이랑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껄껄한 웃음소리와 함께 들리는 옆집 아저씨의 말씀 “허허허 그놈들 봐라 그래 오늘 미꾸라지 얼마나 잡았나 어디 한번 보자.” 하시는 게 아닌가. 놀라 뛰어나와 보니 내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광경에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그렇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비가 갠 뒤라 여기저기 물이 고여 있는 데서 얼마나 뒹굴고 장난을 쳤는지 온통 흙탕물 범벅이 된 채로 옷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까만 눈동자만 반짝이며, 연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에 이 엄마의 아픈 가슴은 아랑곳하지 않고 흙탕물 속에 뒹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때의 그 속상했던 기억은 두 아이의 엄마에게 무지개 빛 추억을 안겨주었고, 푸른 희망 가득 품은 농촌의 넉넉한 마음을 가진 아이로 자라주길 바라는 마음처럼 두 아이 모두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다.
도시의 아이들이 초등학교부터 이 학원 저 학원 공부하러 갈 때 흙과 뒹굴며 엄마, 아빠일터를 놀이터 삼아 놀며 시간이 나는 대로 일 도와주던 그 아이가 지금은 저 농촌의 넉넉한 마음을 닮은 아이로 자라주어 자신들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에 난 너무도 감사할 따름이다.
이 모든 걸 이겨내며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농촌이자 우리 아이들의 마음의 휴식처인 이곳이 힘들고 지치고 기쁠 때나 슬플 때 언제든 쉬어갈 수 있는 희망의 푸른 의자가 되고, 버팀목으로 버티어주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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