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식 목사 / 사회활동가

 

지난 18일 수원 KBS 드라마센터 아트홀.
이날부터 3월 27일까지 이곳에서 열리는 아카펠라 뮤지컬 ‘슈퍼스타’ 출연자들이 리허설로 분주하다.
정신적·육체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장애 아이들이 아티스트가 되는 과정을 코믹하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린 ‘슈퍼스타’는 실제로 뇌성마비 장애를 겪고 있는 배우 김호빈과 피아니스트 김경민이 10여명의 비장애인 배우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화제가 되고 있는 뮤지컬이다.
“이봐 거기선 액션이 더 자연스러워야지, 발성도 불안정하잖아”
무대 아래서 들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
80년대 초반부터 90년대 초 ‘밥풀떼기’라는 애칭으로 코미디계를 풍미했던 개그맨 김정식 (52) 씨다. 아니 김정식 목사다. 아니 여기선 김정식 감독이라 불러야 하나?
뮤지컬 ‘슈퍼스타’의 예술감독으로 나선 김정식 목사.
이번 일을 하게 된 계기를 물었다.

김정식이 목사가 됐다?
“목사가 되기 이전에도 장애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 왔어요”라며 “장애우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편견, 거리감을 좁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장애우들에 대한 편견? 공감대 형성?....
“장애우 봉사를 열심히 하시는 분들조차 막상 자기 동네나 아파트 단지에 장애우 복지시설이 들어온다면 기를 쓰고 반대하지요? 그게 현실입니다. 진정으로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죠.”.... 이해가 된다.
김 정식씨는 2007년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중이다.
“장애우복지선교를 하고 있죠. 그들이 교회에 나오기 어려운 일이니 제가 찾아다니며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 개그맨 중 하나였고, 후배들에게 나름대로 깐깐한 선배로 한 성질 한다던 그가 목사가 됐다?

화려했던 개그맨 시절
“잘 나가던 시절이었죠.”그는 지난 ‘80년대초부터 90년대 초까지의 개그맨으로서의 전성기 시절을 회상한다.
정식은 국민학교 5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이 기울어 형제들은 친척집으로 이리저리 흩어지고, 기차 역 신문팔이에, 어머니는 거리 행상에 무척 어려웠던 청소년기를 보냈다.
“홀어머니가 늘 병마에 시달렸죠. 어려운 가정형편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방송계로 진출하리라 마음먹었어요.”
그는 KBS개그맨 콘테스트에 최양락과 콤비를 이뤄 출전, 1981년 KBS 공채 개그맨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1회 출연로로 1만 5천원을 받았다. “어머니 약값을 댈 수 있어서 좋았어요.”
1982년 콤비 최양락과 선보인 액션 개그가 히트를 치면서 스타반열에 오르기 시작했다.
“서서히 잘 나간다 싶었는데...” 군대 영장이 나왔다.
“죽을 것 같았어요. 어머니 걱정에, 인기가 한창 오르고 있는 상황에...다녀오면 모두가 날 잊을 것만 같았어요.”
그래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갔고 정식은 다시 방송계로 돌아왔다.
한때 콤비였던 최양락은 홀로 활동하며 최고 개그맨 반열에 올랐지만 정식은 어디도 설 자리가 없었다. 우울한 시절. 개그프로가 아닌 어린이 프로그램 ‘꺼꾸리와 장다리’에 출연하며 재기를 꿈꿨다.
“그때 임하룡 형이 손을 내밀었어요.”
그리고 터지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 백과’ ‘꽃집 아가씨’등의 코너가 인기를 얻더니 임하룡, 양종철 등과 출연한 코너 ‘도시의 천사들’이 폭발적 인기를 끌며 ‘밥풀떼기’라는 애칭이 생겼다. '밥풀데기‘는 김정식의 확실한 캐릭터로 자리 잡으며 그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사실 기고만장하고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던 시절이었죠. 돈도 많이 벌었고”
안되는게 없었고 지갑은 항상 두둑했다.
그렇게 화려한 80년대가 가고 90년대가 온다.

나를 부쉈다
세월이 가자 방송환경도 변했다. 개인기가 능숙한 개그맨들이 각광받는 시대가 온 것이다. 정식은 서서히 주류에서 밀려났다. 흥미도 잃었다.
“1998년 방송계를 완전히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죠.” 2년 만에 혼자 잠시 한국에 들어온 그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저를 못 알아보시는 거예요. 젊은 시절 그토록 고생만 하시던 어머니....”
정식은 아내와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국에서 어머니를 돌보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간호하며 자신도 몸을 많이 해쳤다.
“인생과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병자들, 장애우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죠”
인생항로의 방향타가 돌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장애우들을 위한 인터넷방송국 ‘사랑의 소리’ 본부장직을 맡은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봉사활동에 뛰어든다.
특히 인터넷방송 시절 알게 된 중증 뇌병변 환자 동생과 있었던 에피소드가 그의 현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전병을 좋아하는 날 위해 그 친구가 전동휠체어를 타고 경기도 광주에서 서울까지 과자를 가지고 오는데 울퉁불퉁한 보도블럭에 과자가 하나둘 떨어져 버렸대요. 그런데 그 친구는 그걸 주울 수조차 없는 거예요. 겨우 서너 개 남은 전병을 나에게 전했고 저는 그걸 먹으며 갑자기 울컥해,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죠.”
그후 그는 장애우들과 함께 인생을 보내리라 결심했다.
아내를 통해 신앙생활을 시작한 김정식은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2007년 목사안수를 받는다.
그는 낭랑한 목소리와 심금을 울리는 웅변솜씨를 이제 목사로서, 장애우를 위한 봉사와 선교활동에 쏟는다.
여기저기 간증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걸어온 길을 이야기하며 우리들이, 우리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외치고 다닌다.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이고 행복해 보이는 그의 얼굴.
장애우들의 친구 김정식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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