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일공동체 대표 최일도 목사

 

최일도 목사의 밥 푸는 삶…그 진한 이야기

“아~술냄새, 왜 또 술 마셨어~ 마음 괴롭다고 술만 자꾸 마시면 몸만 축나고 일도 안 되고 이래선 안 돼. 뭔가 단단히 결심을 하고 살아야지.”
지난 9일 서울 전농동에 위치한 ‘밥퍼 나눔 운동본부’ 앞에서 최일도 목사가 한 중년남자를 붙잡고 권면중이다. 중년남자는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술냄새가 퍽퍽 풍긴다.
그 뒤로는 어림잡아 400여명의 무의탁노인, 행려자, 노숙자 등 형편이 어려운 이들이 밥퍼 나눔운동본부가 제공하는 한끼 식사를 제공받기위해 100여미터 정도 늘어서 있다. 하루 한끼 이곳에서의 식사가 전부일 수 있는 그들에게 ‘밥퍼 나눔운동본부’에서의 점심은 하루의 유일한 행복한 시간이자 되풀이되는 무기력한 인생의 재확인 장소이기도 하다.
이날은 마침 외교통상부 직원들이 나와 배식 봉사를 하고 있었다. 자리를 함께한 민동석 차관은 “하~ 쉽지 않은 일인데요. 이런 일을 23년 동안이나, 그것도 서울에서도 거칠고 척박하기로 유명한 청량리 사창가 일대에서 말이죠.”라며 최 목사의 진한 사반세기 봉사의 인생에 존경을 표했다.
작년 12월25일 새로 문을 연 밥퍼나눔운동본부는 이제 번듯한 3층 건물에 깔끔한 주방과 수 백명이 한꺼번에 식사를 할 수 있는 넓은 홀을 갖게 됐다.
“하지만 본부의 오늘이 있기까지 지난 23년간의 고생과 그 동안 얼마나 많은 후원자들의 물적, 정신적 지원이 있었는지 어떻게 말로 다 하겠습니까…” 최 목사의 회상이다.

독일 유학 대신 청량리 사창가로
최 목사는 장로교 신학대학을 마치고 동 대학원을 다니던 지난 1988년 독일 유학의 꿈을 안고 청운의 나래를 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길거리에 굶주림으로 쓰러진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가진 것은 없고 우선 라면을 한 봉을 끓여드렸다. 할아버지는 라면 한 그릇에 기력을 회복했다.
“제 인생의 방향이 변하는 순간이었죠. 유학을 다녀와 세계적인 부흥사가 되는 것보다, 대형교회에서 목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민중 속에서 그들과 함께 숨 쉬며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아주 작은 것부터 나눌 수 있는 그런 목회자가 돼야겠다. 거룩한 말씀보다 우선 라면 한 봉지가 생명이 되는 가난한 우리 이웃들. 우리에겐 하찮을 지라도 그들에게 절실한 것들. 그것을 나눠야겠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이 아니겠는가”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곧 속칭 588로 불리는 청량이 사창가 일대 빈민촌에 가난한 이웃을 위한 나눔공동체를 설립한다. 1989년 9월 10일 ‘다일공동체’를 조직해 도시빈민들을 위해 라면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조악하고 보잘것없는 자금과 시설 속에서 한 명, 두 명으로 출발했다.
소식을 들은 근처 7개 교회가 후원을 시작했고 다시 수 십개 교회가 힘을 보탰다. 드디어 하루 500여명에게 식사를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청량리 다일공동체 1층에 있던 식당은 더 이상 몰려드는 인파를 감당할 수 없었다. 1994년 연 ‘오병이어’ 식당이 더 이상 제 기능이 어려워지던 차에, 2002년 드디어 오랜 숙원이던 ‘밥퍼 나눔운동본부’가 동대문구청의 도움으로 오늘날의 터전인 동대문구 답십리3동 554번지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가장 소중한 가족, 그러나 가장 큰 벽
그러나 이런 과정 속에는 수많은 시련과 난관이 있었다. 늘 재정에 허덕였고 인력이 갈급했다.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도 견디기 어려웠다. 음해, 투고, 진정, 항의, 욕설….
“그러나 제일 피눈물을 흘려야했던 부분은 어머니와 아내조차 벽으로 다가섰다는 것이죠. 철저한 신앙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어머니조차 당장 그만두라고 하시는가 하면 아내는 심지어 이 일을 계속한다면 이혼할 수밖에 없다고 눈물을 뚝뚝 흘렸지요.”
“공동체 시작 5년이 되던 해에 ‘아이고 하나님 나 정말 이 일 못하겠습니다. 이 힘든 십자가를 이제 제게서 치워 주십시오’하는 기도가 나오더라고요.”
그런 원망으로 가득 차 있던 그때. 그는 다시 성서를 읽으며 경건의 의미를 되새겼다.
‘참된 경건은 환란 중에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야고보서 1:27)’
“처음 시작할 때 이 말씀 하나를 붙들고 시작했는데, 그 동안 저는 저 자신만 경건하다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경건하지 않다는 착각과 오만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 말씀 중에는 분명 ‘환난 중에’라는 말이 있지요. 내가 처한 환난 중에서도 남을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경건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다시 시작했고 모든 비난과 불평, 뜻밖의 해코지를 온 몸으로 견뎌냈다. 어머니와 아내도 서서히 마음을 돌렸다.

한국 나눔운동의 큰 줄기로 성장
최 목사에게는 항상 회자되는 독특한 이야기꺼리가 있다.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아내와 김연수 시인과의 결혼이야기다.
신학교도 미처 입학하기 전의 애송이 청년 최일도는 당시 수녀가 되기 위해 하나님께 인생을 바치려고 수녀원에 있었던 아녜스 로즈 수녀에게 죽도록 매달렸다. 김연수 시인은 말한다.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겠다고 해 대는데 정말 그럴 것 같았다”는 말이다. 그의 구애가 얼마나 끈질기고 집요했는지 그녀는 아녜스 로즈를 버리고 최일도의 아내 김연수로 ‘환속’한다.
최 목사는 그런 아내를 선녀로, 자신을 나무꾼으로 종종 비유한다.
아내는 신학교를 다니는 남편을 위해 직장생활을 하며 열심히 뒷바라지 했다. 아내의 헌신적인 뒷받침으로 열심히 공부했고 독일 유학을 눈앞에 두고 있던 그때, 그 굶주린 할아버지를 만났던 것이다.
이제 다일공동체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인 소외된 이웃을 위한 사랑나눔체로 우뚝 서 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주린 배를 채우며 반딧불이 빛같은 미미한 온기나마 느꼈을 것인가.
최 목사는 말한다.
“베푸는 이는 결코 받는 이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베풂의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모두가 이런 생각을 하고 산다면 우리가 사는 이곳이 바로 천국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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