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기자의 ‘세상만사’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아직은 세를 얻기 전 야인시절의 이야기다.
조선조 헌종~철종조에 이르기까지의  그 시절은 안동 김씨들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해 그들의 손아귀에서 조선팔도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였다.
비록 왕손이라고는 하나 무엇 하나 변변하게 갖춰진 게 없었던 흥선군은 흡사 비루먹은 초상집 개꼴로 이집 저집 세도 재상집을 기웃거리며 농지거리나 주고받는 가여운 처지였다.
그러나 안동김씨 일족 중에서 유독 김수근의 둘째 아들인 김병국만은 흥선군을 홀대하지 않고 살갑게 대해 주었다. 그는 흥선군의 살림형편이 곤궁한 것을 알고 때때로 생활비를 보내주고, 새해가 되면 흥선군댁 도련님들의 연줄 대금으로 50냥 혹은 100냥 씩 보내주어 김병국이 흥선군에게 세배라도 갈라치면 삼촌 대하듯 반갑게 맞아주었다.
물론 김병국의 이러한 적선은 혹시 모를 훗날의 일에 대비한 교묘한 줄대기 술수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언젠가 한해의 세모(歲暮)에 흥선군이 이른 아침 김병국의 집을 찾아갔다.
마침 사랑채에는 김병국을 만나려는 문객들이 그득하게 들어앉아 있었는데, 아침식사시간임을 알리는 청지기의 소리가 들리자 사랑채에 모여앉아 있던 문객들이 전부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런데 흥선군 만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김병국이 의아하다는 투로 흥선군에게 물었다.
“대군께서는 혹 무슨 볼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흥선군이 헛기침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한해가 다 가는 마당인데도 우리집 부뚜막은 온기 하나 없이 썰렁하다오. 연말연시에 쓸 일도 적잖은데 가진 돈은 없고 해서 이렇게 염치를 무릅쓰고 찾아왔소”.
그러자 김병국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털털 웃으며 “그런 일이라면 저를 찾지 않고 누구를 본다는 말씀입니까?” 하고는 청지기를 불러 1만냥짜리 어음을 가져오게 해 건네주었다.
흥선군은 이 돈을 가지고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고, 자초지종 얘기를 전해들은 흥선군 부인 민씨는 고마움에 눈물까지 흘렸다.
이 일로 훗날 흥선대원군이 권좌에 올라 안동 김씨들을 탄핵할 때 김병국만은 화를 면하는 면죄부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연말연초들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얼굴 없는 기부천사 얘기가 우리의 언 가슴을 따뜻하게 해준다. 조건없는 사랑나눔, 진정한 적선은 그런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가 이땅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이자 희망의 증거다. 새해에는 우리사회가 그런 따사로운 희망들만 차고 넘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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