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 교수

 

2011년 화두는 상생과 소통

불과 물은 서로 상극이지만
중간에 솥을 걸면
그 속에서 오미가 우러난다.
맛있는 ‘삶의 음식’을 만들어내는
솥단지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한국의 문화다.

21세기 ‘문화와 예술의 힘’에 대한 이어령 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지난해 연말 경기도 가족여성연구원의 초청으로 가족포럼 행사 강단에서 선 우리시대의 지성 이어령 교수는 ‘분열되고 싸우고 갈등하는 시기일수록 꿰매고 봉합하는 여성의 바늘이 필요하다’며 여성의 역할이 필요한 시기임을 새삼 강조했다.

이어령 교수. 말이 필요 없는 우리시대의 석학이다. 대학교수, 초대 문화부 장관 등을 역임했고, 동양과 서양, 옛날과 오늘 그리고 미래까지 넘나들며 지식과 비전을 우리에게 충전시켜 준다. 그래서 한국의 대표적 지성으로 손꼽히며. 각종 수필과 시, 소설 등 100여권의 저자로도 인기가 높다. 무엇보다도 78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의 왕성한 저술 활동과 강연으로 지성을 전파하고 있는 점도 존경스럽다. 새해를 맞아 이어령 교수가 여성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여성의 문화와 예술의 힘’에 관한 것이었다. 이어령 교수의 생생한 강연내용을 담아본다.

# 여성이 힘을 갖게 되는 시기다
글로벌 시대, 세계의 변방에 머물고 있던 대한민국이 세계의 중심국가로 부상했다. 지금 기존의 중심세력은 이미 힘을 잃어가고 있고 새로운 지역의 힘이 커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남성의 주변 역할을 하던 여성들도 더 힘을 갖게 되는 시기가 도래하는 시기다.
요즘은 철학과 문학에 대해 예전만큼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데카르트와 칸트, 쇼펜하우어의 이름조차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있다. 하지만 금융자본주의 G20시대가 되면서 예전의 잃어버린 가치들이 다시 유턴되는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 옛 이야기라고 해서 모두 시대 착오적인 얘기가 아님을 기억해야 하며, 부모에 대한 효, 부부간의 백년해로 등 고전적 가치관이 다시 새롭게 각광받는 시대가 오고있다.

# 인간의 삶…호저의 최적 거리를 유지하라
고슴도치처럼 몸이 가시로 뒤덮인 동물이 호저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서로 가까이 다가서면 가시에 찔리고, 가시를 피한다고 멀리 있으면 체온을 느낄 수 없어 추위에 떨게 되는 게 바로 ‘호저의 딜레마’다. 호저의 모습은 인간의 삶의 모습과 닮아있다. 사회 속에 산다는 것이 외로워서 사귀고 사랑했지만 서로 상처내고 피를 흘리게 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가까워서 잘해준다는 것이 서로 아픈 곳만 찌르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타인과의 일체감을 찾는 ‘호저의 거리’를 찾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혼자 부족함 없이 잘 살수 있게 모든 체계가 되어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있다. 어찌보면 인간들은 더 외로워졌고, 소통과 대화가 더 중요해졌다. 이 외로운 시대에 소통과 대화의 매개체가 바로 문화와 예술이다. 

# 진정한 소통은 ‘사랑의 상처’ 통해서만 가능
사람과 사람 사이 소통의 마지막 방법은 자신의 상처를 숨기지 않고 남에게 보여주고, 만지게 하는 것이다. 2007년 딸의 실명 위기가 계기가 돼 세례를 받아 세간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딸의 실명의 위기로 인한 절망과 회의를 통해 ‘인간의 한계’와 ‘인간이 아무것도 아님’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지식을 얻었고, 아내의 사랑과 자식의 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믿을 수 없었고, 사랑할 수 없었고, 내가 거할 곳이 없었다. 이 허전함 때문에 세례를 받게 됐다. 그리고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내게 되었다. 뒤늦게 종교를 가진 이유다.

# 스스로 머리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라
건성건성 지내며 40년을 사는 것은 하루를 머리로 생각하며 사는 것만 못하다. 그래서 나는 남이 안하는 것을 해왔다고 자부한다. 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 때 연출했던 굴렁쇠 소년이야말로 창조의 산물이고 말할 수 있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올림픽 개막식 때 어린이를 등장시킨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다. 정적 속에서 올림픽 주경기장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굴렁쇠 소년이 나타났을 때 세계는 대한민국을 다시 보게 되었다.
한 우물만을 파는 것은 재미없는 일이다. 우물을 파고, 물이 나왔으면 그다음에는 다른 우물을 파야하지 않겠는가?

# 문화의 힘은 크다
우리나라 말에 ‘감동 먹었다’ 라는 말이 있다. 정신적 굶주림을 표현한 말이다. 우리 민족은 몽고, 한족 ,일본에 침략 당하면서도 침략을 한 적은 단 한번도 없는 나라다. 그것은 문화의 힘이 있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에 배후를 가지고 있는 나라로도 대한민국은 유일하다. 생명을 사랑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남의 가슴에 머리에 못을 박고 피 흘리게 한 적이 없으면서도 언어와 문화 등 문화유산을 오롯이 지켜왔다.
드라마 겨울연가와 대장금은 문화의 힘을 보여준 사건이다. 그동안 아무도 해내지 못했던 일본인과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 잡았고 드라마를 통해 소통을 이뤄냈다. 정치가가 오랜 세월동안 해내지 못한 일을 바로 욘사마 배용준이 해낸 것이다.
 
# 너와 나 사이의 존재하는 공간을 찾아내자
날카로운 바늘을 가진 호저 사이에 서로 상처내지 않고 따뜻함을 유지하는 중간 거리가 바로 ‘어울림’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서구적, 비서구적의 경계의 중간 역할로 두 개를 상생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중요한 저력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한국인의 저력은 ‘내버려둬’라는 단어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내버리지 않고 다시 두었다가 꿰매고 붙여서 또 다른 쓰임새를 창출해낸다. 밥을 버리지 않고 누룽지를 만들고, 김장배추 찌꺼기를 버리지 않고 잘 말려서 시래기를 만드는 민족이다.
분열되고 싸우고 갈등하는 시대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남자들이 들고 있는 칼이 아니라 봉합하고 이어서 새로운 옷을 만드는 여자들의 바늘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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