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영희 홍성군농업기술센터 소장

생활개선사업의 알찬 성공 모델 보여줘

자립형 생활개선회의 성공 모델 이뤄내
3천명 회원 30억 자산규모에 소득창출까지

“생활개선회는 우리나라의 어느 다른 여성단체보다 건실한 단체로서 농촌을 아름답게 가꾸고 건강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농촌의 뿌리를 굳건히 하는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합니다.”
농촌진흥사업의 발전을 위해 40년간을 매진, 올해 지도사업의 꽃이라 불리우는 농업기술센터 소장이 된 강영희 소장은 생활개선회의 나아갈 방향을 스스로 개척하며, 방향 제시를 하는데 온갖 열정을 바친 생활개선 사업의 보석 같은 존재다.
“‘초심 농심 진심’은 변치 않는 저의 원칙이지요. 회원들 가슴에 꿈과 희망을 주며 남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절대 포기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열정을 바쳐 생활개선 사업을 했습니다.”
강 소장은 규모 면에서 생활개선홍성군연합회를 크게 성장시켰다. 강 소장의 지도력 아래 홍성의 여성들이 읍면별, 마을별 생활개선회에 가입, 현재 생활개선홍성군연합회는 140개 마을 3150명으로 결성되어있다. 이런 규모는 시군단위 단체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대 규모이며 홍성지역은 생활개선회를 통해 농촌여성들의 능력과 파워가 결집되고 있다.

홍성의 활력, 생활개선회
또한 강 소장은 땀과 열정을 쏟아 다양한 사업들을 발굴하며, 소득창출을 이끌어내며 홍성의 농촌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왔다.
“농촌에서의 활력은 여성들이 건강하고 즐거울 때 가능합니다.”
강영희 소장의 철학이다. 그러기에 강 소장은 농촌여성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많은 구상을 현실화 시켰으며, 모든 활동에 적극적이고 추진력 갖춘 지휘자를 둔 생활개선홍성군연합회는 여러 가지 사업을 시도하며 큰 성과를 보였다.
강 소장은 농촌교육의 전당인 생활과학관을 국내최초로 건립했다. 그곳에서 농촌여성들의 능력과 자질 향상을 위해 연 3천여명의 교육을 하고있다. 또한 농민자녀 복지를 위해 예식장을 운영해 98년도 1억8천4백만원의 공동기금을 조성했다. 그것을 바탕으로 한식조리사반을 개설, 147명이 자격증을 획득 자생능력을 키워 자녀 학자금 등에 보태 인재육성까지 이뤄냈다. 이외에도 홍성의 홍두골 외갓집떡의 서울 상경을 도와 5개 백화점에 상설 입점시키기도 했다.
강 소장은 열악한 생활환경을 쾌적한 환경으로 바꿔 여성이 일하기 좋은 작업환경에도 노력, 부엌 2300호를 고쳤다. 특히 강 소장은 여성 관련 소득사업지원금 학보를 위해 회원 500여명과 거리 시위를 벌이는 등의 울고 웃었던 많은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고 얘기한다.
또한 2009년에는 전국 각지에서 등산객이 몰려드는 용봉산 아래에 ‘꽃두레’라는 농산물직거래 판매장을 만들고 소득을 올리고 있다.  이곳은 생산자와 판매자간의 직거래장터로 도농교류 상생의 성공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일꾼이자 봉사자로서 지역행사와 축제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렇듯 소득까지 꾀하는 신선하고 야심찬 여러 가지 사업으로 생활개선홍성군연합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이 모든 사업의 기획자이자 조언자의 역할이 바로 강영희 소장이다. 강 소장의 아이디어와 추진력으로 일궈낸 성과이기 때문이다. 돈벌어 자립하는 생활개선회의 새로운 모델을 홍성군 생활개선회가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사는 베푸는 삶도 실천하며 지역사회의 없어서는 안되는 생활개선회의 존재가치와 위상에 기여한  강 소장의 구두 뒷굽은 그래서 항상 닳아 있다.


생활개선회원들 자부심 가져야

이 하 자  생활개선회 초대 회장

“그 때는 지금에 비하면 너무 어려운 시절이었지요.” 이하자 생활개선회 초대 회장은 1994년 생활개선회가 농촌지도자회 분과에서 독립해 진정한 농촌여성의 대표 단체로 출범하던 때를 회상했다. 이 회장은 초창기 어려운 시기를 자신의 헌신적 봉사와 노력으로 버텨냈다. 
이후 그는 2대 회장까지 역임하면서 자립기반을 다지기 위해 남해화학과 자매결연, 비료판매 등을 통해 기금을 조성해 나갔다고 한다.
이후 다양한 생활과제 교육을 강화하고 1천만 가정 한마음통장 갖기, 생활개선회 실천덕목 설정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여 나갈 수 있었다. “생활개선중앙회 창립 당시 회원수는 2만8천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2대 회장에 취임하던 때 회원 수가 5만5천명으로 두 배나 늘었지요” 현재 생활개선회가 회원수 10만을 자랑하고 있으니 생활개선회의 기본 토대가 이하자 회장 당시에 세워졌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봉사활동의 대가이기도 하다. 요양보호사 등의 자격증도 획득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시설에 들러 봉사를 한다. 경기민요도 일품으로 부르는 이 회장은 때때로 어르신들에게 노래봉사도 아끼지 않는다. 
“생활개선회원 수가 10만이 되잖아요. 정말 가슴 뿌듯하고 자랑스러워요. 회원들 모두가 자부심을 갖고 노력해 대한민국 최고 여성단체로 위상을 높여나가기 바랍니다.” 생활개선회 이야기만 나오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는 이하자 회장의 진심어린 당부다. 


생활개선회가 농촌발전 토대 됐죠

임 평 자  농촌생활발전중앙회장(전 농촌생활연구소장)

임평자 농촌생활발전중앙회장(전 농촌생활연구소장)은 생활개선회를 독립적인 농촌여성단체로 자립시키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사람이다. 그는 1990년 내무부 새마을부녀회 소속이던 생활개선회를 농촌지도자회 소속으로 옮긴 뒤 1944년엔 생활개선회를 당당한 독립단체로 사단법인화 시키고 중앙회 결성을 도왔다. 그는 회원들의 자립정신을 키워주기 위해 스스로 명예회원으로 등록해 매달 5만원씩 생활개선회비를 납부하기도 했다. 
생활개선회가 지난 반세기 우리사회에 기여한 바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생활개선회는 농촌여성 스스로 자기능력을 깨닫게 하고 자존감을 갖게 된 것”을 가장 큰 성과로 들었다. 특히 ‘농촌여성일감갖기사업’을 통해 농촌여성들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농촌여성들도 재미있고 훌륭한 공연을 늘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어야 하고, 독서와 다양한 취미활동도 하면서 농촌이 교육·문화의 중심지로도 커 나가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농촌여성신문도 유익하고 다양한 정보를 많이 담아 주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생활개선회는 우리나라 여성관련 조직 가운데 그 역사와 규모, 역할에 있어서 절대 뒤지지 않는 훌륭한 단체”라고 말하는 임 회장은 “앞으로 농촌여성들이 다문화 가정이나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며 아름답고 훈훈한 농촌사회를 만들어가는 일에 더욱 힘을 기울였으면 좋겠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생활개선회는 기착점이자 영원한 고향”

김 현 숙  정선군의회 의장(3~4대 생활개선중앙회장)

“생활개선회를 통해 배운 경험과 봉사의 소중한 체험, 리더십이 군의회 의장 활동에 큰 자산이자 바탕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현숙 정선군의회 의장의 고백이다. 김 의장의 말처럼 생활개선회는 그가 젊은 시절을 통째로 바치며 꿈을 불살랐던 기착점이자 영원한 고향이다
김 의장은 정선군 토박이로 24세 때인 1984년부터 봉사와 헌신의 생활개선회(당시 생활개선구락부)활동을 시작했다. 한결같은 성실과 자기헌신으로 1994년 정선군생활개선회장, 1997년 강원도생활개선회장을 역임했고 그 동안 지역농업발전과 사회적 봉사, 회원간의 유대 등 생활개선회 활성화에 많은 공을 세웠다.
이런 공을 인정받아 1999년에 생활개선회 3대 중앙회장에 추대됐다. 이후 4대 회장까지 연임하며 농업인 소득향상, 생활개선회원 자질향상, 불우이웃돕기 등 회 발전과 사회기여활동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김 의장은 이제 농업을 넘어 군민생활 전반에 걸쳐 복지와 안녕을 위해 일해야 하는 군의회 의장으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있다. 2007년에 정선군 최초의 여성의원으로 군정(郡政)의 루키는 아니지만 평의원시절과는 또 다른 무게를 짊어지게 된 것이다.
“좋은 의정활동요? 간단하지만 어려운 일이죠. ‘농업인과 여성의 눈높이에’ 라는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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