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대목장(大木匠) 전 흥 수

 

사재 1백억 넘게 들여 고향 덕산에 고건축박물관 세워

우리나라 전통 고건축의 총책임자를 지칭하는 대목장(大木匠,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이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무형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우리나라의 대목장 기능보유자는 세사람. 그중에서 한국고건축박물관을 건립해 후학들에게 전통의 맥을 전승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거암(巨岩) 전흥수(田興秀·73) 장인을 만나 본다.

“나는 체계적인 건축이론 공부를 한 일이 없고, 대단한 박물관을 만들어 유명해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다. 단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느끼게 하고픈 마음으로 이 고건축박물관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한국고건축박물관을 통해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아름다움과 건축에 담겨진 뜻 깊은 의미를 심어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할 뿐이다. 또한 젊은 청소년들이 우리 건축에 대한 애착과 전수의욕을 가지고 전통의 맥을 잇는 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 말은 자신의 사재 1백억원을 넘게 들여 국내에선 처음으로 1998년 한국고건축박물관을 건립한 전흥수 장인이 박물관 개관기념자료집 인사말에서 언급한 말이다.
그 자신이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거의 반세기 동안 오로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잡았던 업인 목수일로 모은 전재산을 털어 7년여에 걸쳐 박물관을 손수 지어놓고 털어놓은 심회다.

<고건축박물관 전경.>

 

가난 때문에 들어선 목수의 길
충남 홍성시내에서 예산 수덕사 가는 완만한 산길을 굽이돌아 20분쯤 차로 달려가다 보면 너른 들판을 앞에 두고 야트막한 산등성이 자락에 시위하듯 빙둘러 묵중하게, 그러나 날렵한 치미와 추녀마루를 인 기와집 10여채가 들어앉아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대동리 152-18번지.
이곳이 약 6천여평의 부지에 연건평 1천3백평으로 제1,2전시관과 사진전시실, 연구동, 팔각정 등을 갖추고 있는 한국고건축박물관이다.
모은 재산의 사회환원이라는 생각에서 그가 그의 고향에 마련한 자신의 땅에 고건축박물관을 짓기 위해 첫 삽을 뜬 건 1996년이고, 그후 3년만인 1998년에 1차 개관을 했던 것인데, 실제로 박물관 건립을 생각한 건 훨씬 이전부터였다고 했다.
“그저 생계유지의 수단으로 남들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하는 목수일을 해왔지만, 50여 년을 오직 이 한 길을 걸어온 저로서는 이제 자부심을 가지고 목수일을 다시 해보고 싶은 심정이죠. 흘러간 세월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인생 아닙니까. 그 뜻을 조금이라도 이루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었죠.”

그는 지금 고건축박물관이 서 있는 이곳, 대동리에서 담양 전씨 집안의 3남6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전병석(田炳石) 옹은 오직 평생을 한방과 지리학 등의 한학에만 몰두하던 백면서생(白面書生)이었다는 것. 그러니 가난은 면키 어려운 운명같은 것이었고, 그는 결국 진학의 길을 포기하고 16세 되던 해에 무작정하고 목수일로 들어서게 된다.
“꿈이요? 시퍼런 나이에 왜 없었겠어요. 그러나 가난 때문에 오직 먹고사는데 급급해 꿈을 살릴 꿈조차 꿀 수가 없었지요. 오로지 돈이 한이 돼 돈 많이 벌어 고향에 논 많이 사는 게 당시 내 인생 목표의 전부였습니다.”

뚝심으로 버텨온 50년 외길
자신을 늘 옥죄던 집안 가난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이긴 했어도 그 자신이 남다른 안목이 있어 훗날 집 짓는 일에 있어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 계기는 우연찮게 찾아왔다. 그의 나이 열여덟 되던 해인 1955년 예산의 뛰어난 대목(大木)이었던 고 김중희(金重熙)선생을 만나게 되었던 것인데, 그의 문하생이 되어 그를 따라다니며 일을 하게 된 것이 오늘의 그를 있게 해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비록 어깨너머로 배우는 일이었지만 타고난 눈썰미와 우직스럽다 싶을 정도의 뚝심이 받침이 돼 1961년부터는 전국을 돌며 본격적으로 문화재와 주요 사찰 등의 공사를 거의 도맡게 된다.
그렇게 해서 그의 손을 거쳐 복원 건립 또는 보수된 문화재급 고건축물은 이루 헤어릴 수조차 없이 많다. 창덕궁, 동대문, 오대산 월정사, 예산 수덕사 황화루, 남한산성 동·남문, 부석사 무량수전, 공주 마곡사 연화당과 종각, 속리산 법주사 관음전 등등 1백40여채가 넘는데, 특히 여주의 대순진리회본부도장은 무려 13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한 대역사로 그의 고건축기술의 백미로 꼽힌다.
이제 그가 평생을 바쳐 온 목수일이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려 흡사 한 씻이가 될 것 같은 경사에 흥이 날 법도 하건만 그는 10년 전, 20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랑곳 없이 그의 호인 거암(巨岩), 그 거대한 바위의 모습으로 묵묵히 팔각정 처마밑을 스치는 바람결을 헤아리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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