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문화재단 이 석 총재

<이석 총재가 지닌 소중한 유품은 아버지 의친왕의 붓글씨 대여섯 점이다. 참을 인(忍)자가 새겨진 붓글씨는 인생의 지침이 되기도 했다.>

 

"일제침략으로 사라진 대한황실이
실종된 지 100년 입니다.
황실은 정말 무능하고
무기력하기만 했을까요?
고종황제가 비자금까지 마련해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인생, 대한황실의 명예를
되살리는 일에 당당히 나서려합니다.”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왕손들은 세상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뿌리 왕자로 황실문화재단 총재라는 직함을 갖고 역사 바로세우기와 조선황실알리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석(69) 총재는 할 말이 참 많아 보였다. 한때 ‘비둘기 집’이란 유행가를 부르며 왕족가수로 우리에게 알려진 이석 씨는 모진 세월의 풍파를 헤쳐 온 그간 세월의 사정과는 달리 무척 밝고 평온한 인상을 풍겼다.
“요즘 전국을 돌며 역사 강의를 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너무나 우리나라 역사를 몰라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고종은 슬하에 순종, 의친왕, 영친왕, 덕혜옹주 등 4명의 자녀를 두었고, 이석 총재는 의친왕의 11번째 아들이 된다.
그 많던 왕손들은 다 어떻게 살아왔을까? 그들의 행방이 궁금했다. 덕혜옹주의 슬프고 기구한 운명처럼 일본인과 정략 결혼해 일본에서 생을 마감한 왕족들,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 스스로 삶을 마감한 왕족 등 그들 대부분의 삶은 세상의 무게에 짓눌려 애통하게 살다가 거의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는 게 이석 총재의 증언이었다.
대한황실에 대한 일제침략의 목표는 흡수통합이었다. 고종황제가 스스로 나라를 바쳤다고 외국에 거짓 선전을 하고는, 법으로 모든 황손들을 일본인과 강제 결혼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둘째형은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에 돌아가셨고 다섯째 형은  허정, 장면 정부 시절에 문화재관광국장까지 지내신 분인데 10.26 후 궁에서 쫓겨날 때 피를 토하며 돌아가셨죠.”
참 슬프고 기막힌 그의 가족사는 우리의 근현대사이기도 했다. 황실 후예들은 해방 후 이승만 정권 때 만든 ‘구황실 재산 처리법’으로 모든 재산을 나라에 환속시키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최소한의 왕족으로서의 품위 유지를 위한 아무런 배려가 없었죠.”
왕족들이 세상 풍파를 몸으로 맞으며 지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초등학교 시절, 점심시간이면 가끔 궁녀들이 교자상을 가지고 와서 밥상을 차렸죠. 학교 운동회 때도 ‘왕자님이 경망스럽게 뛰면 안된다’고 해 교장 선생님이 대신 뛴 적도 있죠.” 그 당시 쇠고기를 잘게 다져져 만든 입에서 살살 녹던 궁중식 장조림의 맛을 이 총재는 기억하고 있었다. 누구나 추억을 먹고 살지만 이석 씨의 추억에는 동화 속 왕자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 동화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왕자님이 홀로 일어서기는 더더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왕자님으로 살던 어린 시절
젊은 시절 그는 외교관을 꿈꿨단다.
“스페인에 가서 공주를 만나는 외교관이 되고 싶었습니다.”
한국외국어대 서반어학과에 입학했지만 졸업 후 그는 가수로서의 길을 택했다. 1960년도에 가수생활을 시작했고 결국 그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던 윤비에게 들통나고 말았다.
“창덕궁 낙선재에 계시던 윤비마마에게 어머니와 함께 불려가 꿇어앉았죠. ‘나라가 망하더니 왕자가 광대가 되었구나’하며 윤비마마께서 마루를 치시며 우셨습니다.”
그는 월남전의 상흔도 꽤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1966년 4월에 논산훈련소에 입대해 훈련 받고 파병됐다. 
“밥을 늦게 먹는다고 매를 맞았죠. 그때부터 고생이 시작됐습니다.”
묘하게도 그 당시 처음 간 부대가 히트곡의 이름과 같은 비둘기 부대였다.
69세라는 길다면 긴 세월 동안 이 총재는 여러 번 생사를 넘나들었다. 월남에서도  타고 있던 차가 박격포에 맞으면서 큰 부상을 당한 적이 있다.
“주저하며 여지껏 미루어 왔던 상이병사 신청을 보훈처에다가 올해서야 등록했습니다.”
이석 총재는 부끄러움과 창피를 알며 사는 게 참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전주에 새 둥지를 틀다
1979년까지 이 총재는 조계사 앞 사동궁과 풍문여고 근처의 안국동 별궁, 그리고 칠궁(왕비는 아니었지만 그 후손이 왕에 올랐던 귀빈·희빈·숙빈을 모신 곳)에 머물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왕실 후손들에게 매달 일정 정도의 생활비를 지원해줬다. 그럭저럭 살 만했고 히트곡도 나왔다.
10.26 이후, 청와대 경비를 이유로 느닷없이 헌병대가 칠궁에 들이닥치고 이삿짐도 꾸리지 못한 채  궁에서 쫓겨나기 전까지의 일이다.
“오갈 데가 없었습니다. 다시 오나 보나 하고 뒤도 안돌아보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곳에서는 남 눈치 볼 것도 없고 체면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
미국 생활 10년은 삶을 위한 몸부림이었고, 그만큼 앞뒤 돌아볼 여지없이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미국에서의 고생과 결혼, 그리고 복잡 다난한 이야기를 그는 많이 생략했다. 10년 동안의 미국생활을 정리한 것은 1989년 영친왕의 비인 이방자 왕비의 장례식 참석하러 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후 MBC의 가요초대석 MC자리를 맡는 등 재기를 노렸으나  다시 큰 교통사고를 당하는 불운을 맞았다.
“병원에서 열흘만인가 의식이 돌아왔어요. 인생이 허무했습니다.”
그 후 이 총재는 전국 사찰 곳곳을 돌며 떠돌이 생활을 하며 세상과 부딪치며 온갖 비바람을 몸으로 맞으며 살았다. 그러다가 비로소 2004년 10월, 전주 이씨의 본거지인 전주에 새 둥지를 틀게 되었다.
“전라북도 김완주 도지사가 전주 시장 재직 시절에 150 평짜리 승광재라는 한옥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600채 한옥을 지은 전통한옥체험마을 안의 승광재에서 기거하며 이 총재는 수많았던 생사의 고비에서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하늘이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부여한 임무가 있다는 생각에 황실문화재단을 이끄는 총재를 맡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민주공화국이긴 하지만 상징적 황실을 만들어 영국과 일본, 태국처럼 외교사절을 맞이하는 등 나라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살려야 한다고 봅니다. 대한제국은 사라졌지만 우리의 역사는 결코 지우거나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일제에 빼앗긴 조선황실 복원의 꿈을 키우며 우리 역사 바로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는 이석 황실문화재단 총재의 명함엔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 문장이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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