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무형문화재 제 74호 ‘대목장’ 신 응 수

 

‘알맞게 무겁고 미끄러운 기와지붕의 곡선, 사뿐히 고개를 든 두 처마 끝이 그의 지붕 밑에 배꽃처럼 소박하고 무던한 한국의 마음씨들을 감싸안고 있다’
 이 글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던 미술사학자 최순우(崔淳雨)가 조선궁궐 한옥의 백미라 일컬어지는 비원의 연경당을 묘사한 것이다.
 그 천년 궁궐의 혼을 고스란히 되살려 내는데 온 생을 바쳐온 이가 궁궐 도편수인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신응수(申鷹秀)선생이다.

# 나무와 목수
1941년 6월5일생(음력)이니까 올해로 칠순이다. 그 평생의 3분의 2가 넘는 50년 세월을 오직 한 집, 궁궐 집 짓는 일로 살았다. 그만큼의 세월을 한 길 판 장인들이 어디  그 뿐이랴만은 그 행보가 묵지근한 세월의 무게를 머리에 이고도 독야청청이요 흔들림 없는 큰 소나무, 큰 산 같으니 가히 범상한 장인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래서인지 그는 우직스러우리만치 곧게 뻗어 올라가 천년을 버틴다는 우리 소나무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 나무 다루는 일이나 사람 다루는 일이나 크게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터이니 영낙없이 나무를 닮은 큰 목수다.
“좋은 나무를 만나야 좋은 목수가 될 수 있어. 맘에 드는 나무를 만나는 것은 좋은 사람과 인연 맺는 것만큼이나 어렵지. 산전수전 별별 곡절을 다 겪은 나무는 나이테가 촘촘하고 결이 아름답지. 험한 환경을 이겨내야 강도가 단단해지는 법이거든. 그런 나무가 목재로도 튼실하고… 사람도 다 매한가지여. 그게 또 인생 아닌감…”
그의 말처럼 이 시대 최고의 목수가 되기까지 그도 숱한 풍상을 겪으며 건축공사 현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 사주팔자와 운
선생의 고향은 충남과 충북의 경계지역인 충북 청원군 오창면이다. 9남매 중 여덟째로 충남의 아우내 장터 언저리에 있는 병천중학교에 입학해 논길 밭길 산길로 이어진 20리 길을 걸어서 다녔다. 집안 가난은 그에게도 피해갈 수 없는 커다란 장벽이었다. 결국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에 서울로 올라와 목수일을 하던 사촌형을 따라 여기저기 공사판을 떠돌았다.
“형편은 어려웠어도 타고난 사주팔자는 좋았던 모양이야. 어머니가 날 가지셨을 때 향나무 숲에서 매가 날아가는 태몽을 꿨다는 겨. 그래 내 중간이름자가 획수가 많아 쓰기 어려운 ‘매 응(鷹)’자잖어. 뭘 볼 줄 아는 사람들이 이름과 사주가 좋다더니만, 그 복으로 좋은 스승과 세상인연을 만나는 행운이 많았던 것 같어.”
그는 속없는 사람처럼 털털 웃었다.

# 목수의 꿈
옛적에 목수 최고의 꿈은 궁궐 도편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 꿈이 여물기도 전인 어설프던 시절에 그에게 커다란 행운이 찾아왔다. 궁궐 대목장이었던 이광규씨를 서울 신촌에 있는 한 절의 복원공사장에서 만나게 되었던 것. 그때 신 선생은 선배목수들의 잔심부름과 연장을 갈며 망치질과 끌질, 대패질을 배웠는데, 착실하고 눈썰미 있는 그를 이광규씨는 어깨를 쳐주며 칭찬했다. 그리고 1962년 이광규씨를 따라 숭례문 중수공사장에 가서 ‘궁궐 목수의 전설’로 얘기되는 최원식의 제자인 도편수 조원재씨를 만났다. 그는 자신이 스승처럼 따르던 이광규씨의 스승이었으니 스승의 스승을 만난 것이었다.
도편수 조원재씨는 잔꾀 부리지 않고 오직 묵묵히 일만 하는 그를 눈여겨 봐두었다가 이내 거둬들여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 이로부터 본격적인 대목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970년 불국사 복원공사 때였을 겨. 이광규 도편수가  내게 먹칼(먹을 찍어 선을 긋는 대나무칼)을 주며 먹을 그으라는 겨. 먹칼은 먹줄과 함께 대패질로 다듬은 나무에 자르고 파고, 새기는 자리를 표시하는 도구인데, 목수가 먹칼을 준다는 건 곧 후계자로 인정하고 부편수를 맡긴다는 뜻이거든. 참….”
그 5년 뒤 수원 화성 복원공사 때에는 그에게 도편수를 맡겼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다섯. 이 판에서는 실로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신응수 선생은 최원식-조원재-이광규로 이어지는 ‘궁궐 대목장’의 맥을 이어 받았다.

# “나 아파트에 살어”
그간 복원된 우리나라 궁궐 건축 가운데서 그의 손을 안 거친 것은 거의 없다. 그중에도 그는 경복궁 복원공사를 첫손에 꼽았다.
“그때 꼬박 20년을 경복궁에 출퇴근하면서 93동의 건물을 보수하고 복원했어. 중년에 시작했는데 지난번 8·15때 문을 연 광화문까지 마치고 나니 이렇게 주름살이 늘고 머리가 하얗게 세어졌구먼. 허허...”
그후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 서울 필동 한옥의 집, 경주 안압지 임해전, 대전 현충원 현충문 등의 공사를 총지휘했다. 뿐만아니라 청와대 상춘재와 대통령 관저 등의 한옥도 그의 손을 거쳐 건립된 것들이다.
지금은 조선시대 건축물 복원공사 외에 여의도 국회의사당 내 의원동산에 잘 생긴 한옥을 짓고 있고, 지방사찰의 대웅전 공사를 맡아 잠시의 짬도 없지만, 자신의 모든 재산을 털어넣을 한국전통건축박물관 건립과 ‘오직 죽도록 일만 열심히 하겠다’는 제자 키우는 일로 잠을 설치기도 한다고 했다.
마지막에 누구나가 궁금해 하는 것 하나. 그는 얼마나 멋있는 한옥을 지어놓고 살까....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그 숱한 상상을 뒤집어 엎었다.
“나, 개포동 아파트에 살어.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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