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반지 끼고’ 가수 은 희

 

세월은 가도 노래는 남듯, 역사를 지켜낸 갈옷 보급에 열정 쏟아

갈옷은 우리의 보석,
‘코리아브라운진’ 갈옷을
청바지처럼 세계인에 입히는 게 목표

그때 그 시절의 가수 은희 씨를 만나러 전남 함평 손불면에 위치한 민예학당을 찾았다. 민예학당은 폐교를 리모델링해 은희 씨가 갤러리 겸 작업장 등 다목적으로 쓰고 있는 곳이다. “안녕”하며 멀리서 온 손님을 반기는 목소리는 새삼 그녀가 가수였음을 상기시켜 준다. 새소리인가 착각할 만큼 맑고 고운 목소리다. 깊은 숲 맑은 물 같은 청아한 목소리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고향 제주에서 갈옷을 짓다가 갈옷의 재료가 풍부한 이곳에 터 잡은 지 어느덧 8년 째란다.

노래는 언제든 할수 있지만...
“꽃 모양의 텃밭을 만들었죠. 가운데 꽃의 수술 위치에는 벌레들이 특히 좋아하는 것들을 심었어요. 벌레들과 텃밭의 것들을 나눠먹고 꽃 모양의 텃밭도 즐기고요.”
순수한 감수성으로 농촌에 터를 잡고 자연 속에서 자연의 색을 찾아내는 작업에 몰두한지 20년 째. 이제 가수 은희 보다는 세계적 갈옷디자이너로 더 명성을 쌓고 있는 은희 씨다.
그때 그시절 가수들이 나오는 무대에서 조차 왜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지 물었다.
“노래는 언제든 할 수 있죠. 기타 하나만 있으면요. 관중이 한 사람, 아니 한 명도 없어도  내 노래의 감성을 받쳐줄 자연의 무대라면 관객이 없어도 노래 할 수 있잖아요.”
“생각난다~”로 시작되는 ‘꽃반지 끼고’는 지금도  중장년층들에게는 애틋한 향수로  불리우는 노래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은희 씨(59)는 1971년 18살에 ‘사랑해 당신을’ 이란 노래로 데뷔, 인기를 끌다가 21살에 홀연히 미국으로 또 다른 꿈이던 패션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유학을 떠나며 연예계를 떠났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 이유도 궁금했다.
“정상에 올랐으니까 내려와야죠. 내려올 줄 알아야 된다는 생각을 그때 했어요.”
은희 씨는 이렇게 그 이유를 간단히 정리해 말했다. 짧은 가수 생활이었으나 아직 그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들에게 그의 노래는 그 시절의 꿈과 추억의 보물 창고다.

 

 

토탈코디네이션란 말 처음 도입한 장본인
미국에서 15년만에 귀국, 은희 씨는 패션의 중심지 압구정동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코디네이터란 말을 처음 사용했죠. 토탈 코디샵을 압구정동에 내고 승승장구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 고 중광스님과 천상병 시인 등 예술가들과 교분을 쌓았고, 압구정동의 화려함과 뉴욕생활의 노하우 속에서 오히려 우리 문화와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고향인 제주 장터에서 ‘갈중의’라는 제주 고유의 옷을 본 순간 눈물이 나려고 했어요. 갈중의는 감물로 염색한 제주 지방의 노동복인데 방습,방오,방충기능이 뛰어난 기능성 웰빙 의류죠. 그동안 제가 찾던 아이템이 바로 이거구나 싶었죠.”
색깔이나 기능적인 면에서 감물염색옷인 갈옷은 입는 보약이란 게 그녀의 설명이다.
“블루진을 능가하는 코리아브라운진을 세계에 알려야겠다는 결심을 그때 했죠.” 우리의 토속적 문화상품이 없음에 목말라했기에 갈옷이란 아이템은 그에게 특종을 잡은 것처럼 느껴졌고, 지금껏 갈옷에 매달린 계기가 되었단다.
그동안 IMF 등의 시련을 겪으며, 사업도 여러번의 모진 풍파와 시행착오를 거듭했고 현재는 가족끼리 뭉쳐 감물염색옷에 몰두, 이 분야의 최초 연구개발로 품질향상과 상품보급에 매진하고 있다.

물 좋고 햇빛 좋은 함평에 터 잡다
함평, 낯설고 외진 곳으로 옮겨오게 된 이유는 보다 완성도 높은 감물염색에 대한 욕심 탓이란다. 보길도에서 보령까지 서해안 일대를 샅샅이 뒤진 끝에 이곳을 찾아냈다. 보다 많은 갈옷보급을 위해 원재료인 감이 풍부한 지역으로 옮겨왔단다.
“이곳은 해풍이 불어오는 바닷가로부터 1㎞ 미만의 거리에 있는 데다 일조량도 풍부하고 기후도 온화해 갈옷농사가 잘되는 곳이죠.”
이곳에서 그는 염색과 디자인을 연구하면서 그의 갈옷브랜드인 ‘봅데강’제품을 생산한다. 봅데강이란 ‘이런 것 보셨어요?’ 란 뜻의 제주방언.
하얀 천을 감물에 담궈 갈색빛으로 물들이는 염색 작업에는 마을 주민들도 손을 보태고 있다.
“농촌에서 생산, 판매해서 다시 이익이 농촌으로 돌아가는 사이클이죠. 평생 농사지은 시골 어르신들은 손아귀 힘이 강해서 참 고운 천연염색 빛깔을 만들어냅니다.”
지금은 명품을 뛰어 넘을 줄 아는 감각적인 사람이나 개성을 찾는 사람들이 그의 옷을 좋아하는 단골 고객들이다. 탤런트 고두심씨, 연극배우 박정자 씨등이 그의 갈옷 예찬론자들.
하지만 ‘봅데강’ 옷을 입으려면 이곳 함평 민예학당까지 찾아오는 수고쯤은 감수해야 한다. 민예학당이 바로 전시장 겸 매장이기 때문이다.
은희 씨는 이곳에서 독특한 디자인과 바느질의 활동복 및 내의 등 수제품을 만들어 내는 한편 최근에는 양산을 위해 수도권과 베트남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 공장을 마련해두었다.
“20년 세월동안 천연염색을 하며  6천개 이상의 패턴을 만들었죠. 대량생산을 위한 연습과정이죠. 대량생산을 위해선 원단의 확보도 문제죠. 감물옷 염색은 수작업이어서 원단의 비축과 저장에도 노력하고 있죠.”
우리의 문화상품 ‘코리아브라운진’갈옷을 대중화시키고 세계에 알리기 위한 전초전을 치루고 있다는 게 은희 씨의 말이다.
“새로운 것을 알리는 고난의 길이었죠. 겁도 없이 내 열정과 삶의 전부를 갈옷연구에 쏟았습니다. 우리문화상품 갈옷의 가치를 알기에 외롭고 힘들어도 외길을 가고 있습니다.”
자연에 묻히는 정감어림과 감미로운 색채 속에서 기타와 노래 대신 갈옷에 인생과 운명을 바치고 있는 은희씨의 농촌생활엔 눈부신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