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신문수

 

공룡알 화석지에 상상력 보탠
‘쥬라기마을’ 구상 중이죠

분당 오리역 근처의 아담한 오피스텔, 깔끔하게 정리가 잘된 신문수 화백의 작업실 안은 보통 만화방과는 많이 달랐다. 만화책이 서가에 꽂혀있는 것은 같아도 누런 봉투에 원본 만화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고, ‘로봇찌빠’ 캐릭터 인형들이 떡 하니 서가를 지키고 있다. 화실의 물감 냄새 대신 온갖 만화 주인공들이 반겨준다.
“나이가 7학년인데 아직까지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는 만화가라는 직업이 너무 만족스럽고 즐겁습니다.”
신 화백의 작업대 위에는 쓰다버린 지우개들이 큰 그릇으로 차고 넘칠 지경이다. 사각 지우개의 모서리가 둥글게 닳게 되면 지우는 속도가 더뎌서 쓸모없어진 것을 모아놓은 것이란다. 지우개의 양으로 신 화백의 작업 양이 결정된다.
예전에 비해 작품의 양은 줄었어도 요즘도 교육신문 등에 꾸준히 작품을 싣고 있다. 또한 화백의 대표작 중 하나인 ‘로봇찌빠’는 KBS2의 어린이 시간에 지금도 애니메이션으로도 방영되고 있어 신 화백은 세대를 아울러 어른과 아이 누구나가 좋아하는 만화작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래도 만화페스티벌 등 행사장에서 독자들을 만나면 어린이들보다는 어머니 세대가 더 친근하게 인사합니다.”

 

 

 

스승의 칭찬 한마디에 화가의 길 택해
신문수 화백을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화백의 나이를 알고는 깜짝 놀란다. 항상 동심의 세계를 그리며 밝은 웃음을 선사하는 직업이 ‘언제나 청춘’의 비결이란 생각이 들지만 정작 본인은 스트레스 없이 사는 걸 그 비결로 꼽는다.
“건강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정신적 스트레스를 없애는 것입니다. 만화가라는 직업은 스토리 구성하랴, 만화 그리랴 어찌 보면 이중의 창작의 고통을 겪지만 그 속에서도 여유와 유머를 간직하지요.”
신 화백이 만화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재능을 발견해 주신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의 역할이 컸다. “그림을 썩 잘 그리는구나!”란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에 신이 나서 그리고 또 그린 게 천직인 만화가 입문의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동양화를 그리며 화가의 길을 모색하다, 군 제대 후 생활의 방편으로 택한 게 만화가라고.
“옛날 만화 속 상상의 세계가 오늘 날 현실로 펼쳐지고 있죠. 대단하지요? 우주공상만화 속 모바일 세상이 열렸습니다. 어찌 보면 만화의 힘이지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만화 볼 시간조차 없이 공부에만 내몰리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무엇보다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상상력이 제일 중요한 재산이고, 만화는 그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지요.”
얼마 전 신문수 화백은 ‘시와 만화의 만남전’이란 전시회에서 정지용 시인의 향수란 시에 만화를 그려 넣는 이색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참 의미있는 작업이었죠. 시에 그림을 그려 넣는 시화전 대신 만화를 접목시킨 것인데 반응이 좋았습니다.”
이런 색다른 시도들은 칠순을 넘긴 원로 만화작가에게 활화산 같은 힘이 솟아나게 하는 매력적인 일이란다.
“요즘은 공룡에 또 푹 빠져 있습니다. 국립 자연사박물관 예정지의 하나로 점쳐지고 있는 화성 송산리 공룡알 유적지를 자주 찾고 있지요. 그곳은 참 좋은 만화적 소재지가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 공룡과 사람이 함께 어울렸다는 상상력을 보태면 얼마나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나오겠어요. 그곳에 스토리를 만들고 만화적 상상력으로 쥬라기 마을을 꾸미면 세계적 관광지가 되리라 봅니다.”
노화백은 상상력은 끊임없이 나래를 펼친다.
“만화가란 직업에 대해서 단 한번도 회의를 느낀 적이 없다면 믿으시겠어요? 이 나이에도 독자가 있고 만화를 그릴 수 있어 너무 행복합니다.”
만화를 그리려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다는 신 화백은 명랑만화 주인공처럼 항상 즐겁고 유쾌하다.

신문수 화백은
1939년 천안에서 태어났고 1963년 만화 '카이젤상사'로 데뷔했다. 1972년 어깨동무에 ‘도깨비 감투’, 1974년 소년중앙에 ‘로봇찌빠’를 연재하며 이름을 알렸다. ‘도깨비 감투’는 2003년 만화우표로도 발행되었고 ‘로봇찌빠’ 역시 2009년 한국만화 100주년 기념우표로 나왔다. 출판만화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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