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강 대 욱
경기도박물관 초대관장

 

단군국조(檀君國祖) 이래 농업은 민족사를 일관한 국가경영의 근본이었다. 조선왕도 한양에 사직단(社稷壇)이 국가시책으로 세워진 것도 그러하고 1795년(정조19) 수원에 화성(華城) 축성과 함께 광교산 자락에 사직단이 세워진 것도 그러하다.

농경문화의 보고, 수원
‘토지신은 백성의 주인이요 곡식신은 백성의 근본이다.’
광교산 신령에게 간절한 농민의 소망을 기원한 당시 수원부판관 홍원섭의 사직단교유제 축문(祝文’)이다.
수원의 산하(山河)는 농경문화의 보고(寶庫)나 다름없다. 천연의 생명수인 광교산의 물줄기를 거두어 조성한 저수지 만석거 주변의 대유평(大有坪)은 만석(萬石-벼 만섬)의 수확을 기원했던 정조대왕의 민본정책이념이 그대로 배어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수원에 서울농대가 1907년에 정착한 것이나 1962년 농촌진흥청이 수원에 자리잡은 것은 결코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광교산 자락에 펼쳐진 풍요로운 수원의 농경지는 농경문화의 실상을 그대로 전해주는 삶의 터전이다. 광교산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는 바로 농사를 풍요롭게 했던 천혜의 생명수였다. 수원천이 핏줄처럼 시내를 관통하고 여기에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이 세계인이 공유(共有)하는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통문화자원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것도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일들이 아니다.
서호천, 황구지천, 원천천 주변은 지금도 농경지가 즐비하다. 원천천이 흐르는 곡반정동에 있었던 우시장터에서 농경문화의 실상인 각종 농기구, 농경문화 관련 생활용구 등의 전시물들을 살펴보면서 정감어린 농촌생활을 회고했던 1990년대가 꿈만 같이 느껴진다.

농경문화 전시관 마련을…
이제는 점차 사라져 가는 농경문화의 숨결이 배인 전통생활유물들….
황소가 논·밭을 갈때 썼던 쟁기와 써레는 이제 눈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길이 없다. 트랙터로 논을 갈고 이앙기로 모를 심는 오늘이다. 모든 것이 기계화된 편리함은 좋지만 전통문화가, 그 정신이 뿌리채 뽑혀 나간 것 같아 못내 아쉽다. 더 늦기전에 사라져 가는 우리 농경문화의 전통유물들을 한자리에 모아 보여줄 수 있는 전시관이 우리나라 근대농업의 시원지인 수원에 마련됐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컴퓨터 세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오늘날의 우리 청소년들에게 그리운 우리의 옛 전통생활상을 보여주는 교육효과를 기대할 수 있음은 물론 과거와 현재를 잇는 귀중한 체험 학습현장이 될 것이라 믿는다. 가칭 ‘수원시 농촌생활문화 학습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광교산 자락, 아니면 칠보산 자락 논과 밭이 훤히 보이는 곳에 세워 저 옛날 마을공동 품앗이로 온마을이 하나가 되어 모를 내고 김을 매던 풍경을 재현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련한 지난 세월 청소년시절에 여름이면 마을 동갑내기들이 어울려 계곡물에서 물고기를 잡던 천렵(川獵)의 기억을 되살리며 잠시나마 동심으로 돌아가 보는 것도 농경생활의 정신적 물줄기로 어제와 오늘을 잇는 하나의 청량제가 될수 있을 것이다. 물욕과 이기심으로 찌들어 있는 금전만능의 현 세태를 협동과 공동체정신으로 한 마음이 되었던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유산을 되살려 정화시켰으면 좋겠다.
시간이 나서 황구지천, 서호천, 원천천, 수원천을 두세시간 정도 거닐 때마다 아직도 주변 농경지의 풋풋한 경관이 가슴을 촉촉히 적신다.
지명(地名)은 일차사료(一次史料)다.
만석거(萬石渠), 대유둔(大有屯)·축만제(祝萬堤)·만년제(萬年堤)·북수동우시장, 수원농민의 안녕과 마을의 번영을 기원했던 세류3동 산제당(山祭堂)·골말 성황당, 고색동의 진들, 비루물(연못), 관전보(논에 물을 대는 보), 오목천 등등도 수원이 우리 농경문화의 중심 터전이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는 것을 여적(餘滴)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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