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는 엄동설한의 언 땅 위에 고운 꽃을 피워 맑은 향기를 뿜어낸다.매화는 창연한 고전미가 있고 가장 동양적인 인상을 주기에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특히 추위를 이기고 꽃을 피워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삼아 선조들은 매화를 정원에 심었다.매화가 상징하는 의미는 다양하다. 다 썩은 듯한 고목에서도 봄이 가까우면 어김없이 꽃을 피워 은근하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인 가람 이병기 선생이 서울 계동에 살고 있을때 동네 사람들은 그의 집을 ‘난초병원’이라 불렀다고 한다.매화옥(梅花屋) 서재를 춘하추동 두드리면 마치 언제나 난초 전시회 같았다고 한다.크고 작은 화분위엔 난초꽃이 청초한 향기를 뱉어 방안 가득하였다 한다. 가람은 이미 그때 난초를 기르는데 익숙해 있었고 난초의 멋을 터득하고 있었다.그러나
다산(茶山) 정약용은 정치·경제학자 뿐 아니라 문학의 대가였다. 특히 그는 식물에 조예가 깊어 조선시대의 원림(園林)을 조경했던 조경가이기도 했다. 그는 어린 시절 지방관인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다니면서 각 지방의 수려한 산수경관과 식물에 대한 식견을 넓히고 언제나 자연을 사랑하고 꽃을 가까이 하면서 살았다.그의 시문에는 산다화(山茶花) 즉 동백나무가 많
퇴계 이황(李滉)선생의 매화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퇴계의 방안에는 금방 향기를 터뜨릴 듯한 매화분이 있었다.임종 직전 시중드는 사람에게 ‘저 매화에 물을 주라’고 하였다. 물을 주게 한 것은 매화에 대한 애정이 응축된 한마디라 하겠다.또한 이질로 설사를 만나 방안의 냄새가 풍기자 ‘매형(梅兄)에게 미안하다’면서 매화 화분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으라 하고
선조들은 조경용 수종을 선택할 때는 풍수지리설과 음양설, 민속 등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민속에서는 식재하는 수종이 길흉과 깊은 관계가 있어 식재위치를 결정할 때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었다.일반적으로 큰 나무를 집안 가운데 심는 것은 상당히 꺼렸다. 뜰 가운데 나무를 심으면 집안이 곤궁해 진다고 믿었다. 또한 대문 앞에 버드나무나 대나무 그리고 큰 나무는 무
한국의 조경은 서양과 달리 인공적 아름다움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것이 특색이다. 한마디로 실용과 마감 그리고 철학이 가미된 정원이 한국의 전통 정원이라 할 수 있다.한국의 자연주의적 미의식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대자연의 섭리에 인간이 순응함으로써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꽃이나 나무는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하고 인공으로 수형을 만드는 전지(
나무를 분에 심어 가꾸고 즐기는 행위를 일반적으로 분재 가꾸기라고 한다. 분재는 단순히 분 가꾸기와 달리 나무가 자연스럽고 고목다운 운치를 풍겨야 한다. 즉 창작성을 가미함으로써 비록 나무는 작으나 웅장한 느낌과 예술적 아름다움이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나무를 바라볼 때 대자연이 그려내는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경이 연상되고 오묘한 자연의 운치를 꾸며내는
가화(假花)는 만드는 재료에 따라 종이꽃, 밀꽃, 사권화, 모시꽃, 보옥화, 얼음꽃 등이 있다.종이꽃은 종이에 물을 들여서 만든 꽃으로 민간의식에서 혼례식, 상제례와 무속의식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주로 한지로 만들었으나 화선지보다 만들기 쉬우나 꽃 색이나 모양이 덜 난다. 밀꽃은 한지에 들기름을 먹여서 만든 꽃을 말하고 사권화(絲圈花)는 비단실을 오색으로
자연의 꽃은 아름답지만 생명이 짧다. 생명이 짧은 자연의 꽃을 오래 갈 수 있도록 인공의 꽃을 만들어 사용한 것이 가화(假花)다.지금이야 사계절 꽃을 볼 수 있었지만 옛날에는 엄동설한에는 꽃 한그루도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성스러운 식전에 최대한의 공경을 표시하기 위해 꽃 장식은 필수적이라 조화를 만들어 사용했다.가화는 크고 작은 것을 만들 수 있고
꽃꽂이에 있어 꽃을 꽂는 기구에서 주변의 배경, 꽃에 물을 뿌려주는 방법, 꽃을 감상하는 때와 장소에 이르기까지 허균의 에는 수준 높은 기록을 남겨놓았다. 꽃병은 꽃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정교하고 좋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꽃병을 놓아두는 곳의 환경을 잘 정리해야 하는데 꽃꽂이가 있는 곳에는 향을 피워서는 안 되며 매연을 피해야 된다고 주문한
우리민족은 3(三)이란 숫자를 유달리 좋아했다. 이 3이란 숫자는 예부터 삼신(三神)에 대한 사상, 삼재(三才) 등에서 보듯 신앙에 가까울 정도로 애호 했다.이처럼 동양의 전통 꽃꽂이도 내면적 정신적 요소를 많이 강조 했다, 꽃의 조화와 배합에 있어 색·형·질감 등을 기준으로 하는 것보다 철학적인 원리를 담아 대자연의 윤회를 깨닫고 자각의 마음 경지를 찾았
꽃꽂이는 인간이 자연과 교감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과 인간이 교감하는 꽃꽂이도 문화적 차이에 따라 그 양식과 방법에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꽃꽂이 소재의 경우 초화보다는 화목중심이었고 야생화보다는 재배화 중심이었으며, 여러 종류보다는 한 종류를 단순하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허균의 에서 보고 즐길만한
꽃꽂이란 화초나 나뭇가지를 그릇에 꽂아 인간의 영감과 조형 능력으로 제2의 자연미를 창작 표현하는 기법이다.이런 창조를 통해 인간생활을 풍부하게 하고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할 것이다.꽃꽂이는 인류의 시작과 함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옛사람은 자연 속에서 신이 강림한다고 믿었고 이 자연의 숭배심은 수목 숭배사상으로 이어진다. 수목은 자연과 신, 그리고
꽃의 아름다움을 문양에 담아 인간생활의 여러 곳에 장식용으로 사용하였다. 삼라만상 가운데 가장 장식기능이 뛰어난 것이 바로 꽃이기 때문이다. 꽃문양은 의·식·주생활의 곳곳에서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꽃문양이 상징하는 의미를 보면 장수, 건강, 다산, 출생에 관한 것과 복, 부귀, 공명 등 길상에 관한 것이 있다. 우리 꽃 문화의 특색은 자연주의 정신을 바
인간은 꽃을 그들의 생활 속에 가까이 놓아두고 보길 원했다. 그것은 인간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정서를 고양시키기 때문일 것이다.꽃을 소재로 한 그림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발전되어 왔으며 고분벽화에서도 그 흔적을 볼 수 있다.꽃을 소재로 한 그림 가운데 가장 오래된 화목은 매(梅), 난(蘭), 국(菊),죽(竹) 즉 ‘사군자’라 할 수 있다. 사군자는 바로
풍자는 현실에 대한 부정적, 비판적 태도에 기인한다. 직설보다 날카롭고 강렬한 화법으로 모순에 찬 권력사회를 비판하고 ‘하늘을 가린 손바닥’의 위선을 발가벗긴다.당쟁이 심했던 조선시대가 풍자문학이 발전하였으며 시조와 소설, 판소리 등의 풍자문학이 풍부하게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꽃을 소재로 한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고려말엽에 어떤 스님이 포은 정몽주에게
시와 술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술은 시적 서정을 자극하는 매개가 되었던 것이다. 옛부터 숱한 시가에서는 인생의 무상함과 세상사 허무함을 벗어나려 술을 찾았던 것이다.이규보는 꽃과 술을 다 같이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술을 마실 때 마신 술잔의 수를 계산하면서 마셨다고 한다.‘꽃가지 꺾어 술잔을 헤었더니/ 꽃가진 남았는데 사람 먼저 취해버렸네청하노니 꽃송
꽃과 새는 시에 등장하는 훌륭한 짝 중에 하나였다. 짝을 지을 경우 막연히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새와 꽃이 꼭 따라다닌다. 예를 들면 두견새와 진달래, 기러기와 갈대꽃, 봉황과 오동, 학과 소나무 등이다.이것은 새와 꽃이 전설에 얽인 밀접한 인연이 있어 짝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두견새는 촉(蜀)나라 망제(望帝)가 한스럽게 죽은 후에 나타났다고 하여 그
인간의 애정은 반드시 남녀가 서로 인간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듯이 꽃과 나비의 관계도 예로부터 가장 가까운 관계로 알려져 왔다.‘나비 없는 동산에 꽃은 피어 무엇 하며/ 님 없는 이 세상 난 있어 무엇 하나’ - 중에서‘ 너는 죽어 꽃이 되고/ 나는 죽어 나비 되어삼춘이 다 진토록 꽃 속에 잠이 들어/ 자나깨나 깨나자나 주야장천 놀
꽃과 달이 짝을 이룰 때 시정(詩情)을 더욱 풍부하게 해 주고 있다.달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떨어져 있을 때 달을 보고 그리움에 젖어든다. 고향을 떠나 있는 사람에게는 향수, 수절한 여인에게는 외로움을 달래주는 대상이었다. 꽃과 달이 함께 할 때 달의 색깔도 달라진다. 복숭아꽃에 달은 붉게 비추고, 배꽃에 비친 달은 희게, 매화에 비출 때는 차갑고 파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