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동해가 그리워서 강원도로 가는 길에 인제에 있는 황태덕장에 들린 적이 있다. 덕장에 널린 명태들이 빨래처럼 드러났다. 영하의 날씨에 명태들은 하늘을 향하여 누워있었다. 제 몸을 얼렸다 녹였다를 반복해야 황태라는 상품이 되는 거였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황태가 된다는 걸 황태가 귀가 있어 알까만.생선 중에 명태처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활용도가 높은
학창시절 ‘끼’가 많았던 K는 요즘 ‘줌마 보컬밴드’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맡고 있다. 생업을 하다가 잠시 짬을 내어 연습하고 실력을 다져 무료 공연도 다닌다. K의 얼굴에는 주름은 있어도 해맑다. 어떤 행사에서 아마추어가 악기를 잘 다루는 모습은 왠지 멋져 보인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악기나 댄스 등을 배우며 즐겁게 사는 법을 익히고 활동 범위를 늘려가는
새해가 밝았는데 뭐 달라진 것도 없고 특별히 계획했다기보다는 무작정 남쪽으로 달렸다. 홀가분하게 철저하게 나만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었다. 친목 모임에 가면 흉보는 듯하다가 결국은 돌려서 제집 자랑하는 사람들 때문에 음식을 먹다가 수저를 놓고 싶어진다. 지난주에는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친구한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막둥이 아들이 올해 수시에서 서울대, K
이맘때면 한 해를 살아내느라 수고한 육신 앞에 위로의 포도주 한 잔을 기꺼이 권하고 싶어진다. 반면에 허상으로 무장했던 가면을 훌훌 벗고 진정한 맨살의 나와 마주하고 싶어지는 시점이기도 하다.주말에 홀로 산행을 했다. 올겨울엔 유난히 흐린 날이 많다. 잿빛 하늘을 보며 걷는 동안 멜랑꼴리한 기분에 빠지기도 하지만 이런 침묵의 시간이 좋다. 낙엽 쌓인 길을
작가 이상(李箱)은 그의 소설 《지주회시》(1936)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오십 전짜리가 딸랑 하고 방바닥에 굴러 떨어질 때 듣는 그 음향은 이 세상 아무것에도 비길 수 없는 가장 숭엄한 감각에 틀림없었다.”라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위력과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풍자했다.지갑에 돈이 없으면 겨울이 더 춥게 느껴진다. 카드가 대세인 세상이다. 집을
백화점 엘리베이터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다 다음 차례로 밀렸다. 젊은 주부가 아이를 태운 큰 유모차를 밀고 들어가자 몇 명 타지도 않았는데 더 이상 탈수가 없다. 시중에 인기 있다는 고가의 외제 유모차였다. 이런 경우를 당할 때마다 황당하다. 엘리베이터를 독채로 전세 낸 것처럼 뒷사람들에게 미안한 기색조차 없는 그런 행동은 공간 사용에 대한 무언의 폭력처럼
유헌 시인이 시집 《받침 없는 편지》를 보내왔다. 시의 일부는 이렇다. “하루는 막내딸 집 아파트에 들렀다가 잠긴 문에 삐뚤빼뚤 쪽지 한 장 남기셨어. ‘박일심 하머니 아다 가다’그렇게 돌아섰네.” 처음 읽었을 때는 철자가 잘못됐나 하고 다시 읽었다. 팔십 평생 까막눈으로 사시다가 겨우 한글을 익힌 노모의 받침 없는 글에 자식도 독자도 울컥해진다.보통 글쓰
그곳에 다녀오면 사람들의 성향이 대략 파악된다. 노래방이라는 방이다. 어떤 모임에서는 초면에 식사를 마치고 단숨에 노래방으로 직행할 때도 있다. 몇 곡을 듣다 보면 흥의 많고 적음, 지난 삶의 내력이 마이크를 통해 껍질을 벗는다. 잘 고른 발라드인지 아닌지도 바로 알 수 있다. 가곡만 부르는 고상한 부류들은 반갑지 않다.한 사람의 노래를 두세 곡 들어보면
인근 고교에 붙어있는 대학수학능력시험 안내 현수막을 보니 작년 이맘때가 떠오른다. 재수생 아들을 만나러 시험이 끝날 때쯤 다시 고사장을 찾았다. 시험을 끝낸 수험생들이 몰려나왔다. 그 와중에 한 젊은이가 교문 앞에서 돌돌 말린 붉은 카펫을 펼쳐놓고 누군가를 기다렸다. 고사장에서 나오는 친구를 카펫을 밟고 걸어 나오게 하고, 와락 끌어안고는 뜨거운 격려와 위
경북의 청송과 영양을 시월에 둘러보는 일은 가을의 깊은 속살을 만져보듯 정감이 있었다. 청송에 들어서자 과수원마다 빨갛게 불을 켠 사과나무들이 장관이다. 청송에 위치한 김주영 소설가의 ‘객주 문학관’은 생존해 있는 작가의 문학관으로 이례적이며 폐교를 개축한 사례로 숙식이 가능한 편리한 시설을 갖췄다. 작가는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후 변화 없는 삶이 따분하고
심심하거나 세상 소식이 궁금할 때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사용하게 된다. SNS에 글을 올렸을 때 ‘좋아요’, ‘멋져요’ 등의 반응과 댓글이 줄줄이 달리면 자신의 건재함을 확인하듯 위안을 받는다. 뻔히 아는 이의 글에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무심코 적당한 표정의 이모티콘을 누를 때가 있다. 상호 교류의 소통이 뿌듯할 때도 있다. 글을 통해 근황을 알고 정보를 얻
가끔은 별생각 없이 버스를 타고 한 바퀴 돌아봐도 좋을 것 같다. 찜통더위엔 괜찮은 피서가 되고, 한겨울엔 추위를 피해 달리니 말이다. 실버층이 많이 사는 우리 동네 마을버스는 덜 붐비는 편이다. 버스기사는 차에 오르는 승객에게 친절한 이웃처럼 먼저 인사를 건넨다. 노란색 버스에는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 처음에는 승차했을 때 ‘클래식 음악이라니!’하며 의아
KBS채널 ‘우리말 겨루기’에 나오는 실력 있는 출연자들을 볼 때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우승자가 주부일 때면 같은 주부 입장에서 어려운 낱말들을 정확히 맞춰 나갈 때 나의 얕은 어휘 수준이 부끄러워진다. 그들은 달인이 되기 위해 냉장고 문 한쪽에 국어 낱말사전을 한 장씩 붙여놓고 틈틈이 외우기라도 한 걸까? 채널 M-net의 ‘쇼 미 더 머니’라는 프로는
차별성이 있는 곳엔 사람이 모인다. 새로 문을 연 백화점 푸드코트 한 코너에 겹겹이 줄이 길다. 미국 드라마 ‘섹스 엔 더 시티’에 나왔다는 뉴욕 컵케이크집이 한국에 상륙해서다. 바닐라 푸딩이나 레드벨벳 컵케이크를 맛보려면 30여 분을 기다려야 순서가 오는 진풍경 앞에 입이 벌어졌다. 이탈리아 아이스크림 ‘젤라또’ 코너엔 그 나라 출신 꽃미남을 고용해서 배
잘 익은 대추가 탐스럽다. 모란시장 구경을 하다가 햇대추를 조금 샀다. 대추를 한입 깨물다 문득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라는 오래전에 막을 내린 농촌드라마가 생각났다. 아웅다웅 사람 살아가는 냄새에 다음 방영을 기다리던 드라마였다. 문득 대추나무에 왜 사랑이 걸릴까? 반문해 본다. 대추나무에는 가시가 많다. 연이 날아가다 걸리고 외할머니 부음소식에 어머니의
명절이면 음식상을 차려놓고 사진을 찍어 멀리 있는 아들에게 전송한다는 친구가 있다. 외국에 있어 함께 하지 못하는 마음을 사진으로나마 대신하기 위해서다.오랜만에 책장 정리를 하며 앨범을 보다가 온 가족이 함께 찍은 흑백 가족사진을 보았다. 누렇게 바랜 사진은 40여 년이 훌쩍 지난 사진이다. 그중 세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흑백사진이 아득한 세월의 한
추석이 다가오면 문득 살아생전의 엄마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버지의 술주정이 싫은 날엔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푸념을 하시곤 했다. “내가 살아온 날이 다 소설이다. 책으로 쓰면 소설책 몇 권은 된다.”라고. 나도 삶이 힘들어 지친 날엔 삶에 지쳐 욕으로 달랬던 어머니의 구수한 욕설이 그리워진다.이맘때가 되면 부모님께 변변한 옷이라도 더 사드릴 걸 하고, 지금은
휴가철이면 무조건 떠나는 게 어떤 법칙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휴가철이 지나고 나니 떠나지 않아도 좋았다. 길을 나서면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보내는지에 따라 즐거울 때도 있지만 불편함도 따르기 때문이다.새로운 캠핑 용품이 나오기 무섭게 사들이는 남편 때문에 골치 아파하는 친구가 있다. 그 집 옥상에는 파라솔과 비치 의자 등 올망졸망 야외 레저용품들이 가득하
같은 여자라도 고모 다르고 이모 다르다. 남매와 자매의 차이다. 낯선 곳에서 가끔 느끼는 건 이모와 함께 온 이들은 있지만 고모와 함께 온 구성원은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이모 중심의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시가에는 어떤 결점을 보이기 싫어하다 보니 자연 긴장감을 갖고 대하게 되고 친정 쪽은 아무래도 편한 마음이니. 친정은 친하고 정이 가지만 시
영화 ‘베테랑’을 보고 나오는 뒷맛이 개운하다. 배우 황정민을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가 분(扮)한 서도철 형사의 “내가 죄짓고 살지 말라고 그랬지?” 라며 거대한 갑(甲)에 맞짱 뜨며 한방 날리는 정의감이 찜통더위에 한줄기 소나기처럼 카타르시스를 줘서이기도 하다. 오만과 부조리가 들끓는 기득권층의 무례함 앞에 양심의 칼날로 도려내며 항거하는 모습에서 내가